역사와 현실

‘국뽕’의 시대

“김치의 원조는 파오차이, 한복의 기원은 중국 전통 의상.” 반중정서에 기름을 부은 발언이다. 그런다고 세계인이 김치와 한복을 중국 것으로 착각하지는 않을 거라고 본다. 중국이 주장하는 ‘만물 중국 기원설’은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다만 남을 탓하려면 먼저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는 것이 순서다. 역사를 왜곡하는 그들 앞에 우리는 과연 얼마나 떳떳한가?

역사왜곡은 제국의 식민지배 정당화를 위한 수단이다. 하지만 식민지 지식인의 저항 수단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는 우리 손으로 우리 역사를 왜곡했다. <환단고기> <규원사화> 따위의 위서가 이때 나왔다. 고대 한민족이 대륙의 지배자였다는 내용이다. 명백한 역사왜곡이지만 일제강점기라는 상황을 고려하면 참작의 여지가 있다. 민족 자존심을 회복하는 것이 우선이었으니까.

문제는 해방 이후로도 이따위 터무니없는 주장을 멈추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민족 대륙 지배설’로는 부족했는지 ‘한자 동이족 창제설’과 ‘공자 동이족 태생설’이 나왔다. 누가 그런 터무니없는 소리를 했을까 싶겠지만 1990년대까지도 신문지상에 공공연히 나돌던 이야기다.

소설가 박경리는 신문에 연재한 중국기행문에서 한자가 동이족의 발명품이라는 동양철학자 김범부의 주장을 소개하면서 “허황하게 근거없이 그랬을 리 없을 것 같았다”는 감상을 덧붙였다(한국일보 1989년 10월25일). 대하드라마 <토지>로 상한가를 찍던 시기였으니 발언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초대 문교부 장관 안호상의 기고문은 더욱 가관이다. 중국의 삼황오제는 물론 공자와 진시황도 동이족의 후손이라는 것이다(매일경제 1991년 3월31일). 고구려, 백제, 신라가 대륙에 있었다는 엉터리 연구결과를 대서특필한 언론도 있다. 한국 언론은 환구시보를 탓하기 앞서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한·중 수교 직후 백두산 관광객들은 천지에 올라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이 몰지각한 언행이 동북공정에 불을 지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중국인 관광객이 삼전도비 앞에서 오성홍기를 흔들며 환호한 격이다. 과거의 역사와 별개로 지금의 현실은 존중해야 한다.

국가가 급격한 성장을 이루면 그간 선진국을 모방하기에 바빠 내팽개친 자국의 문화를 돌아보기 마련이다. 높아진 위상에 힘입어 문화적 자긍심이 폭발한다. ‘국뽕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 국가가 고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세계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겪는 일종의 홍역이다. 일본도 겪었고 우리도 겪었고 지금은 중국이 겪고 있다.

한자와 공자가 우리 것이라는 이야기는 오늘날 한국인에게 별 감흥이 없다. 한자를 우리가 만들었다 한들 뭐가 자랑스럽겠는가. 그보다 한글이 백배 천배 자랑스럽다. 공자가 한국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반길 사람도 많지 않다. 오늘날 유교적 잔재는 혐오 대상이다. 고토 회복 역시 철 지난 이야기다. 남북 통일조차 회의적인 청년 세대가 그 시대착오적인 명분에 공감할 리 없다.

이처럼 우리는 국뽕의 시대를 벗어나고 있지만 중국은 아니다. 그러니 중국 누리꾼의 댓글이나 신문기사를 문제 삼는 것도 적당히 하자. 원래 인터넷 공간은 하수구처럼 온갖 잡동사니와 이물질이 모이기 마련이다. 누군가 하수구로 기어들어가 오물을 한 움큼 집어들고 나왔다고 세상이 전부 더러운 건 아니다. 인터넷 게시글은 정부의 공식 입장도 아니고 국민 다수의 의견도 아니다. 반일감정과 반중정서를 이용해 제 잇속을 챙기려는 일부 정치인과 어용학자의 설레발에 동조할 것 없다. 일본과 중국도 반한감정을 국내 정치에 이용한다. 그들의 행태를 예의주시할 필요는 있겠지만 덩달아 흥분하는 건 금물이다.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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