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뜨거운 감자’ 흥선대원군

경향신문 2022. 4. 14. 10:56

1882년 임오군란이 터지자 민씨정권은 청나라에 진압군 파견을 요청했다. 병자호란 후 약 250년 만에 처음으로 2000명의 청군이 서울에 진주했다. 청나라는 민씨들에게 밀려나 있던 대원군이 군란의 수모자라고 보고, 그를 청으로 납치했다. 국왕의 생부에 대한 전대미문의 행동이었다. 고종과 민씨들은 환호했지만, 기쁨은 곧 불안으로 바뀌었다. 대원군이 귀국한다는 풍문이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청도 그를 오랫동안 붙잡아두는 건 부담스러웠고, 조선에는 대원군 지지 세력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특히 위정척사 세력이 강한 경상도에서는 모반 움직임까지 있었다. 어느새 대원군 귀국 문제는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1884년 2월16일 민씨정권의 군사실력자인 한규직이 일본대리공사 시마무라 히사시를 찾아와 대원군 관련 정보를 전했다. 대원군이 청 조정에 2000~3000명의 군대와 조선을 통치할 감국(監國) 파견을 요청하고 있고, 그때 함께 귀국하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시마무라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소에 부치자, 한규직은 기분이 상했던지 “임오군란이 나기 전 저는 조짐을 알았기에 호리모토 중위에게 ‘내란이 일어났을 때 재빨리 도망치지 않으면 크게 다칠 것이오. 그러니 지금부터 머리를 자르지 말고 조선 옷을 은밀히 준비하시오. 그래서 일이 터지면 곧바로 그 옷으로 갈아입고 조선인처럼 위장하시오’라고 충고했거늘 내 말을 믿지 않고 비웃더니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난리를 만나 죽었습니다”라며 자신의 예지력(?)을 과시했다(<비서유찬(秘書類纂) 조선교섭자료 중권>). 호리모토 레이조 중위는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양성하다 임오군란 때 살해당한 인물이다.

사실 한규직의 말이 옳았다. 대원군은 이홍장에게 민비의 국정농단을 비난하고, “대신 한 명을 특파해 서울에 주재시키면서 대소 사무를 처리”하게 해달라며 감국 설치를 요청했다.감국은 전통적인 조선·중국관계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대원군은 고려 때 정동행성을 설치한 전례가 있다며 정당화했다(다보하시 기요시 <근대일선관계의 연구>). 민씨들은 진압군을 요청하고 대원군은 감국을 청원하니, 나라 체통이고 뭐고 이들은 오로지 정적 박멸에만 관심이 있었다.

약 20년 전 일본에서도 막부와 반막부파가 치열한 정쟁을 벌이고 있었다. 조약 체결로 이미 외교공관을 설치하고 있던 서양열강은 호시탐탐 개입하려 했다. 그러나 조슈번은 막부군의 침공을 당하면서도 영국에 군사적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고, 막부 역시 전국을 통일해 도쿠가와 왕조를 만들자는 프랑스의 유혹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외세의 지원은 분명히 엄청난 힘이 되는 건 사실이었지만, 외세와 결탁했다는 꼬리표는 그것을 능가하는 정치적 손실을 가져오는 분위기였다. 아무리 권력투쟁이 격렬해져도 외세와 결탁하는 것은 안 된다는 합의가 정치 엘리트 간에 암묵적으로 있었다.”(박훈 <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시마무라 공사는 한규직의 말을 확인하기 위해 개화파인 홍영식을 만났다. 감국과 청군 파견 정보에 홍영식은 깜짝 놀라며 이를 막기 위해 일본의 도움을 요청했다. 이해 말에 일어난 갑신정변은 어쩌면 청의 감국 파견 소식이 조선의 개화파들을 자극한 측면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시마무라는 이어서 청군 사령관인 오장경(吳長慶)에게 소문의 진위를 물었다. 오장경은 대원군을 귀국시키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며 풍문을 일축했다. 시마무라는 결국 청이 “갑자기 조선을 진짜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 감국대사를 파견하는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이라는 보고를 일본에 보냈다. 그러나 1885년 10월 이홍장의 부하 위안스카이는 대원군을 호위한다는 명분으로 서울에 들어와 청일전쟁(1894)까지 감국 노릇을 했다. 당시 개화파와 일본의 정세인식은 이렇게 나이브했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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