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민족’과 ‘자유’도 일제 잔재?

경향신문 2021. 8. 5. 10:29

한 광역자치단체 교육청의 ‘일제 잔재 청산 프로젝트’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친일행적이 있는 작곡가가 지은 교가, 동서남북 등 방위명이나 ‘○○제일고등학교’ 같은 순서가 들어간 교명을 바꾸고, 그 외에도 생활 속 일제 잔재를 찾아내는 데 수억원의 세금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특히 눈길이 가는 것은 일제 용어를 바꾸자는 내용이었다. 여기에는 ‘반장’ ‘훈화’ ‘휴학계’ ‘파이팅’ ‘간담회’ 등이 꼽혔다. 이것들이 일본말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식민지시대 전공자인 이승엽 교수가 페이스북에 자세히 써놓았으니 참고하시길 바란다.

 

위의 말들이 다 일제강점기 때 쓰던 말이라고 치자. 이거 다 바꾸면 해결되는가. 학부모들의 협조를 요청하는 공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올해는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인 해입니다. 바른 역사의식 정체성확립 및 민주적 학교 문화 조성을 목적으로 경기도 교육청에서 ‘학교생활 일제 잔재 청산 프로젝트’를 계획하여 실시하고 있습니다.” 이 두 문장 속에 밑줄 친 단어들은 다 ‘일제 잔재’다. 필자가 아는 것만 밑줄 쳤으니 안 친 단어들 중에도 더 있을 게다. 일제용어를 청산하자는 공문에 이 교육청은 왜 이렇게 많은 ‘일본어’를 썼는가. ‘민족의식’을 함양하겠다는 충정은 이해한다. 그러나 ‘민족’도 ‘의식’도 메이지시대 일본지식인들이 서구용어를 번역하면서 만든 말이다. 이뿐인가. 신문, 출판, 도서관, 헌법, 민주주의, 야구, 대학, 물리, 철학, 법률, 과학, 자연, 계급, 공화, 진화, 유물론…. 일일이 셀 수가 없다.

 

그래도 이것들은 한자 개념을 이용해서 새로 만들거나, 아니면 기존에 있던 한자 의미를 새롭게 바꿔서 만든 것들이다. 아예 순일본어를 한자로 표기한 것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취조(取り調べ), 입장(立場), 절상(切り上げ)… 이건 좀 더 ‘찐한’ 일제 잔재인가. 이런 사실은 무슨 대단한 전문적인 것이 아니라 위키피디아만 찾아봐도 다 나오는 것들이다.

 

어느 현충일이었다. 한 방송의 아나운서가 국경일에는 국기를 게양해야 한다며, 단 ‘게양’은 일본말이니 ‘국기달기’라는 말을 쓰자고 했다. 그게 우리 민족의 언어생활을 일제 잔재에서 벗어나게 하는 길이라고도 덧붙였다. 이분은 현대 한국어 형성의 역사를 잘 모르고 있다. ‘게양’이 일본어라면 ‘국기’도 ‘민족’도 일본어다. 뜻밖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국어’나 ‘국사’ 역시 이 기준으로는 일본어다. 무엇보다 본인이 하는 일인 ‘방송’도 그렇다. 예를 들어 ‘민족(民族)’이란 어휘는 ‘nation’이라는 서양어 개념이 들어오자, 메이지시대의 일본지식인들이 고민 끝에 만든 말이다. 일본에서는 1900년 전후로 쓰이기 시작했고 우리 사회에서는 1905년경부터 많이 쓰인다. 방금 쓴 우리 사회의 ‘사회’도 똑같은 사례다. ‘society’라는 낯선 개념을 수용하려고 일본인들이 만든 말이다(졸저 <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중 맺음말).

 

내년엔 대통령 선거가 있다. ‘대통령’도 ‘선거’도 19세기 후반 일본에서 만들어졌다. 그에 비해 ‘대권(大權)’은 메이드인 코리아다. 그럼 우리는 대권은 쓰고 대통령이나 선거는 없애야 할까. 작가 김규항은 대권이 왕조시대에나 어울리는 말이지 민주공화국에서는 쓸 게 아니라고 했다. ‘잠룡’도 마찬가지다. 대권이나 잠룡은 일본이 만든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 단어들은 대통령을 암암리에 왕조시대의 임금과 등치시키려는 우리들의 오랜 사고습관을 반영하는 동시에 강화시킨다. 따라서 이 용어들은 대통령은 국민의 권한을 위임받은 공복에 지나지 않는다는 민주공화국의 정신을 훼손할 가능성이 있다. 반면 민족, 국사, 국기, 국가(國歌)는 19세기 후반 일본에서 나온 말이지만, 이 말을 쓰면 우리의 민족정신이 훼손되는가? 자유, 헌법, 권리, 민주주의, 사회를 없애지 않으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후퇴하는가? ‘대권’을 없애야 하는가, ‘자유’를 없애야 하는가. 아니, 그 전에 저 말들을 다 ‘청산’하고 ‘가정통신문’을 쓸 수 있는가?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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