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소학’의 무리

경향신문 2020. 12. 31. 09:44

조선시대 ‘훈구’와 ‘사림’의 대립은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을 마치 선과 악의 대립처럼 이해하기도 하지만 그렇게만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사림이 처음에 훈구세력에게 문제 제기를 했을 때 거기에는 정당한 면이 많았다. 사림이 맞은 역풍이 기묘사화(1519)다. 기묘사화 후 훈구는 사림을 “소학의 무리”라 불렀다. 조롱하는 말이었다.

 

어느 국가나 건국 후 3세대 정도가 지나면 지배집단 내부에 일정한 변화가 나타난다. 조선은 세종이 사망한 1450년 무렵이 그때였다. 탁월한 국왕들의 시대가 저물고 엘리트 권력집단이 형성되었다. 이때 세조가 나선다. 그는 할아버지 태종과 아버지 세종을 잇는 탁월하고 강력한 국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에 동의했던 관료들은 세조의 공신이 되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사육신’이나 ‘생육신’ 쪽이 되었다. 여기까지는 어디에서나 나타나는 현상이다.

 

조선은 이미 태종 때 전국 300여 행정 단위에 향교를 설치했다. 전통사회에선 보기 드문 대단한 일이다. 물론 유학을 가르쳤고, 가장 중시한 가치는 충효였다. 그런데 여기서 강조한 충의 내용이 흥미롭다. 그것은 단순히 임금 말에 복종하라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임금이 잘못하면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충이었다. 죄 없는 어린 임금을 몰아낸 세조와 그의 공신들의 행동은 태종과 세종시대 50년간 향교에서 가르친 원칙에 어긋났다.

 

<소학>은 본래 8세 안팎 아이들에게 일상생활의 예의범절, 바른 언행을 가르치려 만든 책이다. <소학>은 고려 말 도입됐는데, 15세기 말 사림이 재발견해 자신들의 행동강령으로 삼았다. 사림이 정치적으로 탄압받자 <소학>은 금서가 되었다. 사림이 <소학>을 재발견한 맥락의 한 자락엔 훈구에 대한 야유가 있다. 훈구는 아이들도 알아야 할 기본도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기묘사화 후 훈구가 사림을 ‘소학의 무리’라 조롱했던 건 사림이야말로 현실을 모른다는 재반박이다. 어쨌든 현실을 지배하는 쪽은 훈구였다.

 

1980년대 대학생들은 사회과학서를 많이 읽었다. ‘운동권’만 사회과학서를 읽었던 건 아니다. 반면 15세기 후반 사림은 비슷한 상황에서 <소학>을 새롭게 읽었다. 시대가 달랐기에 그런 선택들은 각자 자연스럽다. 어쨌든 1980년대 젊은이들은 자신보다 세상을 바꾸려 했고, 15세기 후반 젊은이들은 자기 자신을 바꾸려 했다. 그런데 사림은 자신뿐 아니라 세상도 바꿨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내면에서 가장 깊이 신뢰하는 가치를 중심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구성한다. 그 가치에 공공성 비중이 얼마나 되는가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소학의 무리’는 사회가 아닌 자신들 내면을 공공성으로 채웠다.

 

2020년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해가 될 것이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올해 우리는 우리나라와 우리 자신을 재인식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선진국들 경험에 우리를 맞추어왔는데, 이제 더는 그럴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 결국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목소리 큰 엘리트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라는 것도 올해 우리가 발견한 것이다. 그 마음이야말로 우리 속에 있는 공공성이다.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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