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신천지’와 공동체 삶의 가치

경향신문 2020. 5. 14. 10:34

20여 년 전 <태조 왕건>이라는 제목의 TV 드라마가 방영되었다. 여기에 나왔던 궁예의 ‘관심법’이 얼마간 유행했다. 왕이 된 궁예는 자신을 살아있는 미륵으로 자처하며 자신에게 반역을 꾀하는 사람들을 마구 죽였다. 역사기록에도 그렇게 나온다. 궁예의 말과 행동은 그 자신의 생애는 물론 그가 살았던 시대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신라는 9세기에 들어서 차츰 국가체제가 와해되었다. 9세기 중반이 되면서 중앙정부가 사회 치안을 유지할 능력을 잃었다. 여기저기 사병(私兵)으로 무장한 유력자들 ‘호족’이 등장했다. 그들은 일종의 군벌세력이었다. 이것은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낯선 풍경이지만 유럽 중세에서는 흔한 광경이다. 9세기 말이 되면 경주의 중앙정부는 더 이상 지방에서 세금을 걷지 못했다. 사회가 더욱 혼란스러워지자 불교의 말세사상이 급속히 퍼졌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구원해 줄 미륵불의 도래를 기다렸다.


궁예는 본래 신라 왕의 서자였다. 하지만 일찍 궁 밖에 버려져서 유모와 함께 살다가 10여 세에 한 불교 사찰에 맡겨진다. 그는 좋은 승려는 아니었던 듯, 자신도 호족이 되려는 꿈을 품고 30세가 넘어서 절을 나온다. 10대와 20대를 절에서 보냈던 셈이다. 그가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데 자신이 가졌던 불교지식은 큰 도움이 되었다.


신라는 불교국가였다. 8세기 중반에 세워진 ‘불국사(佛國寺)’는 부처님 나라를 염원하는 사찰이었다. 그런데 9세기 중반 무렵이 되면서 사람들은 기존 불교 신앙과는 다른 신앙을 찾았다. 기존의 신라 불교는 교종이었다. 당시의 교종은 경주의 진골 귀족들 편에 서 있었다. 불교의 윤회설을 통해서 진골 귀족들이 부당하게 누리는 것들을 정당화해 주었다. 백성들 입장에서 진골 귀족들 편에 서 있는 불교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사람은 다른 불교를 원했고 그 결과 선종이 등장했다. 선종은 교종과 달리 참선을 통해서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신앙의 탈권위주의이자 개인주의였다.


9세기 신라에서 사회적으로 가장 역동적인 세력은 지방 여기저기에서 일어났던 호족이었다. 이들은 서양 근대에 등장했던 부르주아와 다르지 않고, 오늘날 스타트업 기업의 존재와도 그리 다르지 않다. 그들은 개인의 창의성과 노력으로 부와 세력을 확장해 가는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호족들은 자신들이 이미 획득한 무력과 경제력만으로 자신들을 완전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을 신라와 경주에 대한 단순한 반란자들 무리가 아닌 새로운 가치를 지향하는 사회의 대안세력으로 만들어줄 이념이 필요했다. 선종이 그 역할을 했다. 선종과 호족의 결합은 신라를 넘어서 결국 고려의 건국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한국에서 사람들이 보여주는 뚜렷한 정신적 태도의 하나는 탈권위주의이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자신들의 지지대상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기도 하다. ‘갑질’의 폐단이 오늘날보다 더 많이 고발된 적은 없을 듯하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날이 과거보다 사회적으로 ‘갑질’이 더 많아졌기 때문은 아니다. 과거에는 미처 인식되지 못했거나 혹은 참아야만 했던 것을 이제는 인식하고 참지 않게 된 것뿐이다. 그런데, 엄밀하게 보면 탈권위주의는 이념이 아니다. 그것은 부정적으로 인식된 타인의 태도나 행위에 대한 거부이다. 이 때문에 탈권위주의가 가장 중요한 정신적 태도라는 말은 아무런 추구하는 가치가 없다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이렇게 가치 부재의 현실을 파고든 것이 결국 메시아적 신앙이고, 또는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물질주의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궁극적으로 우리들의 현실과 삶을 정당화하고 긍정할 수 있게 할까?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통해서 ‘신천지’ 종교가 주목받았다. 그들이 이단인가 아닌가가 필자의 관심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메시아적 신앙에 빠졌던 사람들이 사회 속에서 다시 자신들의 주체성을 회복하고 자신들의 현재적 삶을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실, 그것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일이다. 현재를 부정하는 메시아적 신앙이나 물질주의를 추구하는 자본주의만으로는 우리의 삶을 회복할 수 없다. 그것은 마땅히 민주주의와 공동체적 삶의 가치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 연구원 전임연구원 pkaljc@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