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요승’ 신돈

경향신문 2021. 5. 20. 10:32

고려가 원나라에 정치적으로 지배받던 ‘원간섭기’처럼 개혁이 끊임없이 시도되었던 때도 없다. 개혁이 끊임없이 시도된다는 것은 개혁이 계속 실패했다는 뜻이다. 그 마지막 시도가 공민왕 때 있었다. 그의 개혁이 실패하자 그다음으로 개혁을 추진한 세력이, 널리 알려졌듯이 조선을 건국했다. 사회의 환부가 너무 깊었고, 개혁에 저항하는 세력의 힘이 너무 강력했고, 그로 인한 갈등의 격렬함이 결국 새 왕조 건국으로 귀결되었다.

 

고려 말 개혁 과제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원나라로부터 정치·군사적으로 독립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그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을 완화 혹은 축소시키는 것이었다. 두 가지는 내용도 다르지만 그것을 요구하는 주체도 달랐다. 공민왕 자신에게 훨씬 절박한 것은 아무래도 앞쪽이었다. 그에게 강한 민족주의적 감정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원나라로부터 정치·군사적으로 독립하지 못하면 그는 언제든 원나라 황제 명의의 쪽지 한 장으로 국왕 자리에서 해임될 수 있었다. 그 앞 원간섭기 왕들 신세가 그랬다. 이 때문에 그가 추진한 ‘반원개혁’은 사실 개혁이라기보다는 자기 자리를 지키려는 노력이었다. 그는 재위 5년에 전격적으로 그 목표를 성공시켰다.

 

공민왕은 재위 24년 동안 몇 차례 사회경제적 폐단들에 대한 개혁을 시도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던 것은 신돈을 내세워 추진한 개혁뿐이다. 하지만 그 개혁도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 신돈은 개혁을 추진하면서 높은 도덕성을 유지하지는 못했다. 여자 문제가 있었고 물품 수수도 있었던 것 같다. 개혁에 반대하고 저항했던 세력은 이것들을 이용해 그를 완전한 사기꾼으로 만들었다. 그러고는 이를 그대로 밀고나가 신돈이 추진했던 개혁까지 송두리째 부정했다. ‘요승 신돈’은 그것을 압축한 말이다.

 

신돈을 발탁할 즈음 공민왕은 고려의 정치적 지형을 이렇게 말했다. “세신대족(世臣大族)은 가까운 무리끼리 뿌리 깊이 얽혀 있어 서로 허물을 가려준다. 초야의 신진은 교만하게 행실을 꾸며 명예를 낚다가, 벼슬이 높아지고 이름이 알려지면 자기 집안이 변변치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세신대족과 혼인하여 그 처음 가졌던 뜻을 다 버린다. 유생은 문생이다, 좌주다, 동년이다 칭하면서 서로 당을 이루고 자신들만의 사사로운 정을 따르니 이 셋은 모두 쓰지 못하겠다.”

 

고려는 대대로 높은 관직을 지낸 막강한 가문, 즉 세신대족의 나라였다. 원간섭기에 등장한 부패한 친원파 인물들은 이제 막 진입한 세신대족이었을 뿐이다. 세신대족들의 커넥션은 부패의 원천이었다. 이들을 비판하며 등장한 초야의 신진이나 유생들 역시 사회적 지위가 생기면 결국 세신대족에게 투항했다. 문생은 요즘 말로 하면 학벌로 묶인 집단을, 좌주나 동년은 과거시험으로 엮인 커넥션을 뜻한다. 공민왕의 말은 당시 상황을 날카롭게 포착했지만 다 맞지는 않았다. 세신대족에게 투항하지 않은 유생들 중 일부가 개혁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현 정부는 집권하면서 개혁을 시도했다. 개혁 방식이나 우선순위에 문제가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현 정부의 시도가 개혁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 개혁은 야유받고 주춤거리고 있다. 흥미롭게도 개혁을 반대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마도 현 정부의 뚜렷한 개혁 성과는, 반개혁 세력이 매우 강력하고 개혁 과제가 한국 사회의 구조 자체와 유기적으로 연관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낸 것이리라. 사실 개인적 차원에서 보면, 공민왕이 비판했던 초야 신진이나 유생의 선택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 편이 사회보다 자신에게 더 좋은 미래를 약속하기 때문이다. 세신대족에게 투항하지 않는, 처음 가졌던 뜻을 저버리지 않는 오늘날의 신진과 유생들은 누굴까?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