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일본사 시민강좌’를 기다리며

코로나가 기승을 부려 학회도 온라인으로 해야 하던 어느 날, 한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울에서 먼 지방에 계시면서도 매달 열리는 학회에 꼬박꼬박 참석하시던 조용한 분이다. 이번에 정년퇴임을 하게 되었는데, 그 ‘기념’으로 학회에 기부금을 내고 싶다는 것이었다. 우리 학회가 그간 쌓아온 일본사에 대한 연구 성과를 시민들과 나누는 일에 썼으면 좋겠다는 나지막한 부탁과 함께 짧은 통화는 끝났다.

작년부터 일본사학회장을 맡고 있는 나는 학회 임원들과 상의하여 ‘일본사 시민강좌’ 같은 걸 해보자는 쪽으로 뜻을 모으고, 코로나가 잠잠해지기만을 기다렸다. 그사이 경향신문에 공동 주최 의사를 타진했는데 흔쾌히 응해주었다.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총 10회의 강연회로, 한국에서 처음 열리는 일본사 대중강연 시리즈이지 싶다.

한국 시민만큼 일본에 ‘관심’이 많은 경우도 달리 찾기 힘들 것이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일본에 경쟁심을 불태우고, 그 동향에 신경을 쓰며 자주 비교한다. 젊은 세대는 꼭 그렇지는 않다고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일본여행, 일본음식, 일본문화가 우리의 일상이 된 지는 이미 오래다. 그러나 그 ‘관심’에 비해 일본을, 특히 일본사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자문해보면, 자신 있는 대답이 나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본사는 일단 낯설고 어렵다. 역사극인 NHK 대하드라마 중 ‘역사문제’와 관련이 먼 것들을 골라 공중파에서 방영하면, 그 거리가 조금이라도 좁혀질지 모르련만, 아직 요원한 것 같다. ‘관심’은 과도한데, 풍부한 지식과 정보에 기초한 체계적인 이해는 너무도 부족한, 그래서 무지와 오해가 난무하는 상황이 지금껏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일관계를 슬기롭게 풀어나가는 데에도, 이런 상황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시민강좌는 한국 시민들이 관심을 많이 갖는 주제를 중심으로 진행될 것이다. 먼저 한·일관계사. ‘백제가 일본에 한자·불교 등 문물을 전해주었다’와 같은 짧은 인상에서 벗어나, 그 실제 내용과 역사적 의미를 세밀히 들여다볼 것이다. 사실 이런 문제들은 ‘한국’ ‘일본’이라는 국민국가의 틀, 그리고 그것들을 정신적으로 지탱하고 있는 민족주의의 틀을 버리고 살펴봐야 제대로 된 모습이 보인다. ‘민족주의’적인 기대를 갖고 접근했으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발견하는 기분, 그래서 내가 당연하게 여겨온 사고방식을 의심하고 상대화하게 되는 경험이야말로 역사학의 참맛이 아닐까 한다.

다음으로 천황과 천황제. 일본은 고대국가가 성립한 이래 무려 1500년 동안 한 집안이 왕 노릇을 해오고 있는 희한한 나라다. 게다가 그저 한 국가의 고색창연한 장식물이거나, 박제된 ‘문화유산’ 정도가 아니라, 하이테크 시대인 21세기에도 그것은 정신적·문화적으로 일본인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지난 세기말 히로히토 사망 때 벌어진 ‘1억 총자숙’과 최근 아키히토 천황의 양위 문제 논쟁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런 만큼 우리는 천황이냐 일왕이냐 하는 지엽말단적인 태도가 아니라, 천황의 기원과 역사적 경위, 그리고 근대에 들어와 천황이 어떻게 변모해서 지금에 이르렀는가 하는 포괄적인 전망을 가질 필요가 있다.

또 하나, 우리로서는 피할 수 없는 식민지와 제국주의 문제다. 이에 대해 우리 시민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은 민족주의적인 서사인데, 이는 우리 내부를 단결시키는 데에는 유용했지만, 국제사회와의 소통을 방해해 온 것도 사실이다. 지금까지의 민족주의 서사가 국제사회를 납득시키는 데 성공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일본사를 공부한 한국인 연구자들’이 식민지 문제에 대해 어떤 새로운 서사를 시도할지, 또 그것이 시민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궁금하다. 올가을, 일본사 향연이 기대된다. 9월20일 스타트.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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