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가족호칭은 언중의 선택

경향신문 2019. 5. 23. 10:24

지난 15일, 여성가족부의 주최로 가족호칭 토론회가 열렸다. 불평등한 가족호칭의 대안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시댁과 처가는 ‘시가’와 ‘처가’로 동등하게 대접하고, 시부모와 처부모는 ‘아버님’과 ‘어머님’으로 통일하며, ‘도련님’과 ‘아가씨’ 대신 이름을 부르자고 한다. 누구 아빠, 누구 엄마보다 ‘여보’, ‘당신’이,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보다 ‘큰삼촌’과 ‘작은삼촌’이 바람직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증조할아버지 대신 ‘최고할아버지’라는 색다른 호칭도 선보였다. 


현재 가족호칭의 가장 큰 문제는 성별 비대칭이다. 쉽게 말해 남편이 사용하는 호칭과 아내가 사용하는 호칭이 불평등하다는 것이다. 오랜 관습이라 별문제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많지만, 호칭을 사용하는 당사자 입장에서는 불평등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불평등한 호칭을 전통이라는 이유로 고집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렇다고 어색하고 생소한 호칭을 새로 만드는 게 맞는지도 의문이다. 


우선 시댁과 처가를 시가와 처가로 바로잡고, 시부모와 처부모 모두 아버님과 어머님으로 부르자는 주장은 타당해 보인다. 처부모에 대한 전통적인 호칭은 원래 장인어른, 장모님이 아니라 아버님, 어머님이다. 뿌리 깊은 데릴사위제의 유습 탓인지 사위가 처부모를 아버님, 어머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조선중기까지 보편적인 관습이었다(홍석주, <학강산필>). 퇴계를 비롯한 유학자들은 잘못된 풍습이라고 비판했지만, 유학이 이 땅에 들어오기 전부터 존재한 전통이다. 오늘날의 사위들 역시 처부모를 아버님, 어머님으로 부르는 데 거부감이 없다. 처부모의 면전에서 장인어른, 장모님이라고 부르는 사위가 오히려 드물지 싶다.


가장 불평등한 호칭으로 지목되는 것이 ‘서방님’, ‘도련님’, ‘아가씨’다. 남편이 아내의 형제자매를 부를 때와 달리 아내는 남편의 형제자매에게 존칭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원래 서방(書房)은 청년, 도령(都令)은 아동, 아기(阿只)는 유아의 호칭으로, 남의 집 아들딸을 높여 부르던 말이다(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 남편 형제자매의 호칭으로 자리 잡은 건 그리 오래지 않아 보인다. 


도련님과 아가씨라는 호칭은 이미 일제강점기부터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 대안으로 등장한 호칭이 ‘삼촌’과 ‘고모’다. 물론 내 삼촌과 고모가 아니라 내 자녀의 삼촌과 고모라는 뜻이다. 이 또한 오래된 호칭이다. 이렇게 나 아닌 다른 가족과의 관계에 입각한 호칭을 ‘가족관계적 호칭’이라고 한다. 


우리말은 원래 호칭이 부족하다. 중국의 경우 8촌 이내의 친척은 태어난 순서대로 번호를 매긴다. 장삼(張三), 이사(李四)라고 부르는 항제법(行第法)이 그것이다. 항제법을 쓰면 호칭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런 관습이 없으므로 자녀나 형제자매의 이름을 넣어 불렀다. 누구 엄마, 누구 언니 하는 식이다. 여성만 그런 것이 아니다. 남성도 이름보다는 누구 아빠, 누구 삼촌으로 불렸다. 그러지 않으면 달리 부를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이익, <성호사설>). 


호칭 대신 이름을 부르라고 하는데, 이름을 함부로 부르기 어려워하는 것이 우리의 문화다. 손아랫사람은 몰라도 손윗사람에게는 더욱 어렵다. 남편의 형이나 아내의 언니를 ‘아무개씨’라고 부를 수 있는 간 큰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손아랫사람에 한해서만 이름을 부른다면 그 또한 불평등한 호칭이다. 


반면 가족관계적 호칭은 불평등한 요소가 없다. 오랫동안 널리 썼으므로 거부감도 적다.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고 주체성을 잃는 것도 아니다. 가족호칭이 가족관계를 반영하는 게 무슨 문제인가. 이 점에서 누구 아빠, 누구 엄마라는 호칭을 문제 삼는 건 납득이 가지 않는다. 누구 아빠, 누구 엄마는 잘못된 호칭이고, 본디 길 가는 사람을 부를 때나 쓰던 여보, 당신은 올바른 호칭인가. 가족관계적 호칭은 불평등한 가족호칭의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다.


그 밖의 대안은 전통적 가족호칭의 역사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아무 말 대잔치에 가깝다. 큰삼촌과 작은삼촌은 가족호칭으로 적절치 않다. 촌수는 가족관계를 가늠하는 척도에 불과하며, 원래 그 자체로는 호칭이 될 수 없다. 특히 손윗사람을 촌수로 부르는 것은 대단히 무례한 짓으로 여겨졌다(정약용, <아언각비>). 새로운 호칭은 거부감이 심하다. 증조할아버지 대신 ‘최고할아버지’라는 기상천외한 호칭이 널리 쓰이기를 과연 기대할 수 있겠는가. 새로운 호칭이 정착되려면 한 세기 이상의 세월이 걸릴 것이다.


언어를 사용하는 대중을 언중(言衆)이라고 한다. 불평등한 호칭이 자연스레 평등한 호칭으로 대체되는 과정을 보면, 언중은 결코 어리석지 않다. 언어가 바뀌려면 시간이 필요한 만큼, 현재의 가족호칭에 아직 차별적 요소가 남아 있을 수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호칭은 언중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 각 가정과 개인이 자유로이 결정할 문제이며 굳이 하나로 통일할 필요도 없다. 민간단체가 벌이는 캠페인이라면 몰라도 정부 기관이 나서서 이래라저래라 할 문제는 더욱 아니다. 언중을 계몽하고 획일화하려는 오만하고 편협한 생각은 버려야 한다.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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