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공론과 공정

경향신문 2021. 8. 12. 10:12

1579년 5월, 낙향해 있던 율곡 이이가 조정에 상소를 올렸다. 낙향한 지 3년 정도 지난 시점이었다. 자신을 사간원 수장인 대사간에 임명한다는 문서를 받자, 이를 사양하며 올린 상소였다. 조선시대 사간원은 사헌부와 함께 조정 언론을 주도하는 핵심 기관이었다.

 

조정에서 이이를 대사간에 임명한 이유는 분명했다. 4년 전 조정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며 시작된 당쟁이 이제 아무도, 심지어 왕조차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있었다. 이이에게 조정에 나와 급한 불을 꺼달라는 요청이었다. 이이의 상소문은 길고 간절했다.

 

“동인과 서인에 대한 논의가 오늘날 큰 문젯거리가 된다고 하니, 이것은 신이 매우 우려하는 점입니다. 국시(國是·오늘날 말로는 정치적 올바름, 혹은 그에 따른 국가 정책)를 정하는 일에 있어서는 더욱 구설(口舌)로써 다투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인심(人心)이 다 같이 그렇다고 여기는 것을 공론(公論)이라 하고 공론이 있는 것을 국시라고 하니, 국시란 바로 온 나라 사람들이 의논하지 않고도 옳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익으로 유인하는 것도 아니고 위협으로 두렵게 하는 것도 아니며 삼척동자도 그것이 옳은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국시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른바 국시라는 것은 이것과 달라서, 다만 논의를 주장하는 자가 스스로 옳다 하면 그 말을 듣는 자 중 어떤 사람은 따르고 어떤 사람은 어기기도 합니다. 평범한 사람들까지도 시비가 반으로 나뉘어 끝내 하나가 될 기약이 없으니, 어찌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설득하여 억지로 결정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사람들의 의혹만 더 불러일으켜 도리어 재앙의 빌미만 만들 뿐입니다.”(<선조수정실록> 권13, 12년 5월1일)

 

자신의 대사간 임명을 거절했던 이이는 결국 다음해 12월 조정에 나간다. 동인과 서인의 정치적 갈등을 더 이상 멀리서 지켜볼 수만 없었다. 조정에 복귀한 이이는 무엇보다 동인과 서인의 화해와 협력을 강조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철저히 실패한다. 2년 반 정도가 지나 동인이 장악하고 있던 홍문관에서 이이를 비판하는 길고 격렬한 글을 올렸다.

 

“애당초 동서(東西)의 설이 있었을 때 그 사이에는 벌써 사정(邪正·사악함과 올바름)과 시비(是非·옳음과 그름)가 있었으므로 사대부의 공론이 모두 동(東)이 정(正)이고 서(西)는 사(邪)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이는 치우쳐 서를 부추기고 동을 억누르는 마음을 하루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선조실록> 권17, 16년 7월21일)

 

조선은 왕조국가였음에도 국왕이 자기 마음대로 통치할 수는 없는 나라였다. 조선시대에 가장 강력한 정치적 기준은 ‘공론’이었다. 조정에서 공론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은 곧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이 때문에 공론 획득 자체가 가장 치열한 정치적 전투의 목표였다.

 

오늘날 조선시대 ‘공론’에 해당하는 단어를 찾는다면 ‘공정’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공정’도 조선시대 ‘공론’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듯 보인다. 이이는 “온 나라 사람들이 의논하지 않고도 옳게 여기는 것” “이익으로 유인하는 것도 아니고 위협으로 두렵게 하는 것도 아니며 삼척동자라도 그것이 옳은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으로 ‘공론’을 정의했다. 현실에서 그런 것이 존재할 리 없다. 현실은 늘 의논과 이익과 위협이 존재하는 세계이다. 모든 공정들은 그것을 주장하는 이들이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공정이다.

 

공자는 <논어> ‘안연’편에서 정치할 기회가 생기면 무엇부터 하시겠냐는 제자의 질문에 정명(正名), 즉 명칭을 바로잡는 일부터 하겠다고 말한다.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조리가 없고, 말이 조리가 없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라 덧붙였다. 그런데, ‘정명’을 시도하는 일이 또 한 번 논란의 빌미만 만들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말로써 말을 종식시킬 수는 없다.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