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공론과 유튜브

경향신문 2020. 1. 23. 11:29

선조12년 5월에 수년째 낙향해 있던 이이에게 대사간 벼슬이 내려졌다. 나라의 언론을 총괄하는 자리였다. 이이는 이를 사양하면서 긴 상소를 올렸다. 다음은 그중 일부이다. “관직은 국가의 공기(公器)이니 마땅히 공론(公論)에 따라서 시대의 인재를 다 등용해야 합니다. … 국시(國是)를 정하는 일에 있어서는 말로 다투어서는 더욱 안 됩니다. 모든 인심이 다 같이 그렇게 여기는 것을 공론이라 하고 공론이 있는 것을 국시라고 합니다. 국시란 온 나라의 사람들이 꾀하지 않고도 옳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해(利害)로 꾀는 것도 아니고 위협으로 두렵게 하는 것도 아니며 삼척동자도 그것이 옳은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국시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른바 ‘국시’라는 것은 이것과 달라서 다만 논의를 주장하는 자가 스스로 옳다 하면 그 말을 듣는 자 중 어떤 사람은 따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어기기도 하며 평범한 사람들까지도 시비(是非)가 반으로 나뉩니다. … 그사이에 깊은 학식과 원대한 사려를 가진 선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사람의 논의에 눌려 자기주장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선조수정실록>권13, 12년 5월1일 기사)


선조12년은 동인과 서인 간 당쟁이 격렬했던 때이다. 동인들은 조정에서 서인을 모두 몰아내고 있었다. 이이는 동인이 자신들의 주장을 공론과 국시라 주장하며 서인들을 배척하는 행태를 비판했다.


요즘도 “국시란 바로 온 나라의 사람들이 꾀하지 않고도 옳게 여기는 것입니다”라는 이이의 말이 이따금 인용된다. 하지만 이이가 언급한 공론과 국시는 현실에서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첫째, 어떤 개인도 자신의 주관적 경험을 사회 전체적으로 균형 있게 배치하여 객관적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불가능하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어도 그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보통 직접 경험한 일들에, 사실이라고 믿는 것들을 더하여 각자의 생각을 일반화한다. 우리가 ‘사실’로 생각하는 것들에는 이미 검증되지 않은 ‘믿음’이 섞여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둘째, 우리는 자기 삶의 조건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각자의 생각을 만들어간다. 선택할 수 있는 여러가지 사실과 믿음들 가운데 자신의 삶에 유리한 것을 선택하는 것은 그야말로 ‘인지상정’이다. 한 가지 더 말한다면,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끼리의 어울림은 검증되지 않은 주관적 생각을 더욱 사실처럼 만든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이고, 우리는 누구나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더 선호한다. 이러한 몇 가지 사실들이 “온 나라 사람들이 꾀하지 않고도 옳게 여기는 것”의 존재를 어렵거나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요컨대, 우리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이데올로기적 성향을 띠게 된다.


오늘날 방송 기술의 발전으로 공론과 국시를 추출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졌다. ‘팟캐스트’나 ‘유튜브’ 방송으로 누구나 자기 의견을 대중에게 알릴 수 있게 되었다. 엄밀하게 본다면, 개인 의견이 대중에게 더 많이 알려진다고 해서 더 옳거나 객관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더 많이 알려짐으로 하여 얻어지는 사회적 영향력의 증대가 그것을 더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큰 흐름 중 하나는 권위주의의 타파, 혹은 해체이다. 전혀 권위가 없는 권위주의는 이제 ‘꼰대’나 ‘갑질’이라는 말로 객관화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긍정적인 사회현상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권위주의’와 ‘권위’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권위주의’는 타파해야 하지만, 사회 각 방면에서 진정한 ‘권위’는 만들어나가야 한다. 진정한 권위는 이이의 말대로 사람이 이해관계에 따라 선택하는 것도 아니고 물리적인 힘에 위협받아서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물론 진정한 권위조차 객관 그 자체는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적어도 납득할 수 있는 주관성이다. 진정한 권위는 개인과 집단이 사회적 이해를 초월해서 긴 세월 쌓아온 전문성과 진정성에 대한 정당한 존중일 뿐이다. 


지금 한국사회는 진정한 권위가 크게 부족한 사회이다.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 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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