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외세의 지배를 받았던 대표적인 사례로 흔히 ‘일제강점기’를 떠올린다. 하지만 한국사 전체로 보면 훨씬 더 오랫동안 외세의 지배를 받았던 시기가 있다. 1259년부터 1356년까지 97년간 계속된 중국 원나라의 고려 지배가 그것이다. 학자들은 이 시기를 ‘원간섭기’라고 부른다.

 

원나라의 고려 지배는 겉보기에 그리 억압적이거나 강제적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매우 성공적이었다. 더구나 고려는 원나라를 통해서 다양한 선진문물을 받아들였다. 원나라는 사실상 최초의 세계제국이다. 성리학이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도 이때이다. 전성기의 원나라는 개방적이었고 지금 관점에서 보아도 정치적으로 유연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원나라와 고려의 관계가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아니었던 것은 아니다.

 

원나라의 지배가 지속되면서 원나라를 이용해서 자기 이익을 꾀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부원배(附元輩)’라 불리던 사람들이다. 일제시대 ‘친일파’ 형성과 별로 다르지 않은 현상이다. 음식을 상온에 두면 곰팡이가 스는 것처럼 나라가 외세의 지배를 받으면 자연스럽게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물리적 현상이다. 늘 그렇듯이 원나라와 가까운 사람들 중에도 다양한 부류가 있었다. ‘부원배’라 불리던 사람들은 그들 중에서도 지탄을 많이 받던 사람들이다.

 

공민왕은 즉위하자마자 개혁기구인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세워 개혁을 추진했다. ‘도감’은 임시기구를, ‘변정’은 개혁을 뜻한다. ‘전민’은 경작지와 노동력을 말한다. 당시 땅과 노동력에 대한 사회적 양극화는 두고 볼 수 없는 상태였다. 당시 상황을 가리키는 말로, ‘부자는 산과 강을 자기 땅의 경계로 삼을 정도로 넓은 땅을 가졌고, 빈자는 송곳을 꽂을 정도의 땅도 없다’는 표현이 지금껏 전해온다. 힘 있는 자들은 농민들 땅을 불법적으로 침탈했고, 거기에서 나온 수확물을 수탈했다. 하지만 고려 조정은 그것을 바로잡지 못했다.

 

공민왕의 개혁은 당연한 조처였지만, 곧바로 실패했다. 개혁이 실시되자마자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서 강력한 메시지를 전했다. 원나라에 반대하는 성향을 띤 조치를 유도하는 사람들을 정치에서 배제하라는 요지였다. 고려의 기득권층도 강하게 저항했다. 그들은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알았다. 그들은 전민변정도감의 폐지를 요구했다. 이런 안팎의 협박과 저항 속에 공민왕의 첫 번째 개혁 시도는 말 그대로 간단히 제압되었다.

공민왕 3년에 개혁과 관련해 의미 있는 사건이 일어났다. 원나라에 내란이 일어났고 원나라가 진압할 군사를 파병해 줄 것을 고려에 요청했다. 이는 원나라가 내란을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데 곤란을 겪고 있음을 뜻했다. 그로부터 약 2년 뒤에 공민왕은 다시 개혁을 추진했다. 이번엔 성공하는 듯 보였다. 지탄받던 부원배의 거두 여러 명을 제거했고, 원이 고려를 지배하기 위해 세웠던 기관도 폐지했다. 그때까지 사용하던 원나라 연호 사용을 중지했고, 관직도 개편했다. 이 모두를 두 달도 안되는 기간에 해치웠다. 그러자 원나라는 80만 대군을 동원해 토벌하겠다고 공민왕을 협박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원나라는 급속히 기울고 있었다. 결국 10년쯤 뒤인 1367년에 원나라는 패망했다.

 

원나라가 패망했지만 공민왕은 자신의 개혁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따져보면 공민왕 5년의 개혁은 개혁의 시작이지 본질은 아니었다. 개혁의 본질은 ‘전민변정’, 즉 땅과 노동력의 양극화를 바로잡는 것이었다. 개혁이 본질에 접근하자 부원배들이 강력히 저항했다. 공민왕의 개혁에 원나라 자체보다 더 강력한 저항세력은 부원배였다. 97년에 이르는 원나라의 지배가 만든 결과였다.

 

‘부원배’라 불리며 표면적으로 사회적 지탄을 받았지만, 사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부러운 존재였다. 그들은 부유했고 남들이 누리지 못했던 권력을 가졌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호의를 원했고, 그들 집안과 혼사를 맺고 싶어 했다. 그들은 심지어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섰음에도 공민왕 사후에 권력을 되찾을 정도였다. 공민왕은 원나라로부터는 개혁을 지켜냈지만, 결국 부원배에게는 패배했다.

 

부원배만 개혁에 반대했던 것은 아니다. 반개혁세력은 여러 겹의 동심원처럼 켜켜이 존재했다. 이 시기 신진사대부들의 지도자였던 목은 이색 같은 사람들도 반원정책과 적극적 개혁에는 반대했다. 심지어는 공민왕이 이끌던 세력 내부에서도 그와 같은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개혁은 내내 지지부진하게 표류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공민왕이 개혁을 시작한 지 41년 후에 조선이 건국되었다. 공민왕은 자신이 시작한 일의 결과를 보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끝내 결실을 맺었다. 역설적이게도 개혁과제가 크면 클수록 개혁을 위한 더 큰 힘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것은 마침내 조선의 건국으로 이어졌다. 혹시 부원배들이 그렇게 강력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개혁이 순조로웠다면 왕조가 안 바뀌지 않았을까?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정말 그렇다면 조선 건국의 진짜 원인 제공자들을 부원배로 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요즘 일어나는 일들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정철 한국국학진흥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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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