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국가가 할 수 있는 일

경향신문 2021. 12. 30. 11:25

2013년 그리스는 재정위기에 놓여 있었다. 즉시 구제금융을 받지 못하면 유로존에서 퇴출될 상황이었다. 유럽중앙은행(ECB)이 구제금융 실시 결정을 앞두고 있었는데, 사실상 결정권은 독일이 가지고 있었다. 독일 국민 여론은 구제금융 실시에 부정적이었다. 결국 구제금융이 실시됐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유럽중앙은행은 유로화 사용 15개국의 국가별 가계 자산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많은 이들의 예상 밖이었다.

독일은 가계 자산 중앙값이 5만1400유로(약 7530만원)인 데 비해 그리스는 10만2000유로였다. 독일은 조사 대상 국가들 중 꼴찌였고, 그리스는 독일의 2배였다. 유럽중앙은행 발표에서 독일과 그리스 사례는 우연이 아니었다. 그 당시 키프로스, 그리스, 포르투갈, 그리고 부분적 구제금융을 받은 스페인의 가계 자산 중앙값은 구제금융을 제공한 독일과 북유럽 국가들의 가계 자산 중앙값보다 훨씬 높았다. 여러 해 전 자료이니 이 수치가 지금은 다소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가계 자산 같은 거시 지표는 변동이 완만하다. 아마도 전체적인 그림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유럽중앙은행 발표 후 독일에서는 말 그대로 난리가 났다고 한다. 당시 메르켈 총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독일은 견고한 사회안전망과 직업연금 체계를 갖고 있다.” “독일인의 높은 연금 수령액이 이번 조사에 고려되지 않았고 해외에 보유한 자산도 포함되지 않았다.”

메르켈의 말은 유럽중앙은행 발표 내용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 내용과 메르켈의 말은 상충하지 않는다. 요컨대 독일의 보통 가구는 가진 자산이 별로 없어도 ‘사회안전망’과 ‘연금’으로 살 수 있다는 뜻이다. 두 가지 모두 사회 시스템이다. 독일은 사회 시스템 자체가 보통 사람들 삶의 기반인 셈이다.

조선시대에 ‘환곡’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흉년이나 춘궁기에 정부가 빈민들에게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거의 이자 없이 거둬들이던 제도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환곡’이라는 말을 들으면 곧바로 ‘3정의 문란’이라는 단어가 뒤이어 떠오를 것이다. 조선이 ‘환곡’을 비롯한 3가지 세금 제도 운영을 잘못해서 나라가 망했다는 뜻이다. 환곡에 대한 이 인식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환곡은 전근대 국가들 중에서 조선이 거의 유일하게 국가 차원에서 실시한 제도이다. 농업이 기간산업인 나라에서 가장 큰 경제적 위험은 기후였다. 적어도 수년에 한 번씩 흉년이 찾아오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적은 규모의 땅에 농사짓는 소농(小農), 다시 말해서 국민 대부분은 자력만으로 흉년을 헤쳐나갈 힘이 없었다. 흉년에는 주변에서 곡식을 빌려야 했다. 그런데 금융이 발달하지 못한 전근대 모든 사회의 금리는 지금보다 훨씬 높아서, 지금으로 치면 고리대였다. 이런 고리대를 이겨낼 수 있는 소농은 거의 없었다. 소농은 흉년을 만나면 삶의 기반인 자기 땅을 잃을 가능성이 높았다. 환곡은 정부가 거의 이자를 받지 않고 주로 소농들에게 대출해주는 제도였다. 말하자면 국가적 차원에서 실시한 경제 전체에 대한 보험제도였다.

장기적으로 정부가 환곡제도를 유지하기는 쉽지 않았다. 대출 원곡은 그 저장에 자연 손실이 발생했다. 사료에 ‘서축(鼠縮)’과 ‘부상(腐傷)’으로 표현되는 내용이다. 쥐가 쏠거나 부패해서 원곡이 상했다는 뜻이다. 대출된 곡식이 모두 회수될 수도 없었다. 흉년 뒤 풍년이 온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환곡을 연구한 문용식 교수에 따르면 그럼에도 조선은 환곡제도를 1840년대까지 운영했다. 이것이 문란해지고 20년쯤 지나자 민란이 잇달아 일어났고 결국 조선은 몰락했다. 조선은 시스템 위에서 유지되던 나라였다.

코로나 재난 상황이 국가의 존재 이유를 되묻게 한다. 국가가 국민 모두를 부자로 만들 수는 없어도 당대의 역사적 기준에 비추어 빈곤에 빠지지 않게 만들 수는 있었다.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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