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국가의 일

경향신문 2020. 6. 11. 10:19

48년 만에 한 해에 세 번째 추가경정예산이 편성된다는 뉴스가 전해진다. 또 올해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이 1960년대 경제성장을 시작한 이래 세 번째로 마이너스가 될 것이라는 뉴스도 같이 전해진다. 물론 이것은 코로나19의 영향이며, 사정은 다른 나라들도 비슷하다. 오히려 한국은 성공적 방역으로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그 부정적 영향이 가장 적다는 사정이 그래도 불행 중 위안이 된다.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집단은 중소상공인 자영업자들이란다. 그럴 것이다. 우리나라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 자영업자 비중이 높다. 그래서 이번 추경에서도 이들에 대한 지원이 상당한 몫을 차지할 것이란다. 국가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생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면에서 전통시대의 기후상황은 오늘날의 경기변동과 유사한 면이 있다. 오늘날도 날씨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없지 않지만 과거에 비할 바는 아니다. 전통시대에 기후는 그야말로 농업생산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가뭄으로 농사를 망친다는 것은 한 해 전체의 수입을 잃는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농업이 천수답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1960년 대규모 댐이 건설된 이후이다.


고려왕조와 조선왕조의 말기에 사회적으로 가장 큰 문제는 부의 양극화였다. 당시 부를 구성하는 대부분은 땅, 즉 경작지였다. 땅은 점점 소수의 사람들에게 집중되었고, 다수의 소농(小農)들은 거대 지주의 노비 혹은 소작농이 되었다. 그에도 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유민(流民), 즉 떠도는 사람들이 되었다. 이들 중 완력이 있는 사람들은 초적(草賊)의 무리를 이루어 자신들과 다름없이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을 약탈했다. 그들 중에서 간혹 부자들을 습격하는 도적이 나오면 ‘의적(義賊)’이라 불렀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 국가가 가장 경계했던 것이 바로 농지 소유의 양극화였다. 농지 소유가 양극화되면 늘 두 가지 현상이 동시에 벌어졌다. 하나는 거대한 토지와 노동력을 확보하게 된 사람들이 그 자체로 정치적 영향력까지 갖게 되는 일이다. 부와 권력은 대개 호환성이 높다. 하나를 가지면 다른 것도 갖게 된다. 다른 하나는 이런 현상이 벌어지면 국가는 세금을 거둘 수 없고, 병력(兵力)을 구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세금을 내고 군인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거대 토지 소유자들에게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제로섬 게임이었다. 당시 지식인들은 이런 현상을 “백성을 해치고 나라를 병들게 한다(殃民病國)”고 통렬히 비판했다. 이 현상이 진전되면 대개 사회의 무정부 상태를 거쳐 국가권력이 붕괴된다.


그런데 이런 농지 소유의 양극화는 기존에 힘 있던 사람들이 소농들의 토지를 강제로 약탈했기 때문이 아니다. 토지 소유 집중이 진행되는 과정은 이렇다. 몇 년에 한 번씩 가뭄으로 인해 흉년이 들게 마련이었다. 흉년에도 최소한의 식량은 구해야 하고, 그것을 제공할 수 있는 사람은 같은 지역에 사는 여유 있는 지주이다. 그 여유란 한두 해 정도 흉년을 넘길 수 있는 정도의 식량을 가진 것을 뜻한다. 식량을 빌리면 돌아오는 가을에 이자를 내야 했다. 전통시대의 이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금보다 훨씬 높았다. 정부는 이자가 원금을 넘지 못하도록 하는 법을 정했지만 현실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그런 이자로는 아무도 식량을 빌려주지 않았다. 이자는 대개 복리였고, 그중 다수는 고리대였다.


이런 연쇄구조에서 소농이 한 번 빚을 지면 그것에서 빠져나오기는 어려웠다. 결국 그 소농의 농부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남았다. 하나는 가족과 함께 살던 곳을 떠나서 유민이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땅을 넘기고 스스로 노비나 소작농이 되는 것이다. 조선후기에는 이를 막기 위해 한전법(限田法), 즉 부자들의 토지 소유 규모를 제한하는 법이 제안되기도 했지만 실현되지는 못했다. 고려는 마지막에 부의 양극화를 개혁하지 못해 조선으로 넘어갔고, 조선 역시 마지막에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수십년 민란의 시기를 거친 후에 패망했다. 마침 기본소득의 필요성에 대한 이야기가 시민사회와 정치권에 등장하는 듯하다. 그 내용은 시간이 지나야 구체화되겠지만, 그 필요성만은 충분해 보인다. 국가의 지원은 사실 시혜라기보다는 국가의 자기방어 활동이다.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 연구원 전임연구원 pkaljc@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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