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그게 관점의 차이인가?

경향신문 2019. 12. 12. 15:16

똑같은 일이라도 관점이 다르면 달리 보인다. 세상이 시끄러운 이유는 바로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고위공직자의 비리를 수사할 공수처를 둘러싼 논란도 그런 것이 아닐까. 그런데 관점이란 것이 이해관계로 결정되는 일도 적지 않다.

 

역사가인 나는 지금 중종 5년(1510) 11월 어느 날의 경연 풍경을 떠올리고 있다. 그날도 훈구파 대신들과 신진사류는 서로 옥신각신하였다. 그들은 경전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현안에 대하여 논란을 벌였다. 그날따라 대신 성희안이 목소리를 높이며 신진사류들을 압박하였다.

 

그 무렵 전라도 전주에서 한 지방관이 사직서를 제출했다. 신진사류인 그 관리는 자신의 비위 사실이 적발되자 바로 사직서를 제출하고 고향으로 떠나려 하였다. 보고를 접한 성희안은 분노했다. 수사가 마무리되기 전에 자기 마음대로 물러나는 것은 조정의 권위를 무시한 처사라는 해석이었다. 최근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이야기와 비슷하였다.

그러자 중종은 성희안의 말에 적극 찬성했다. 분위기에 압도된 모양이었다. ‘그 사람을 체포하여 조사하는 것이 옳겠다. 내가 듣건대 요즘에는 사직서도 내지 않고 멋대로 관직을 그만두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이런 일이 생기면 해당 지역의 관찰사에게도 책임을 묻겠다.’(조선왕조실록, 14책, 474쪽)

 

그럼 당시의 실상은 어떠했던가. 공신이나 대신은 큰 죄를 저질러도 쉽게 마무리되었다. 끝까지 혐의 사실을 캐내어 처벌하는 일이 사실상 없었다. 그런데 문제가 된 관원은 일개 신진사류였고, 그래서 성희안은 그의 여죄를 밝혀 징계하겠다고 벼른 것이었다.

 

훈구파 대신들은 모든 경전을 동원하여 자기들의 이익을 방어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이미 지탄의 대상이 되고만 옛 관습도 포기하지 않았다. 또, 폐단이 많기로 정평이 있는 옛 제도조차 옹호하였다. 그것이 그들의 이익에 부합하였기 때문이었다. 중요한 것은 항상 자신들의 이익이었다.

 

중종 초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그날도 경연에서 신진사류들은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중종 2년 11월15일). 두 가지 현안이 거론되었는데, 하나는 왕실 재정을 담당하는 관청인 내수사가 고리대금에 종사하고 있어 원성을 산다는 지적이었다. 또 하나는 대신들의 직무유기로 최고의 행정기관인 의정부가 직무에 태만하다는 비판이었다.

 

그러자 대신들은 제도개혁의 필요성을 단호히 부정했다. 영의정 유순은 말하기를, 의정부의 폐단이라면 이미 옛날부터 지켜온 관행이라 그대로 두는 편이 낫다고 했다. 우유부단한 중종은 그 말에 수긍했다. 또, 중종은 왕실의 고리대 역시 대왕대비의 뜻이라서 고칠 수 없다고 강변했다(조선왕조실록, 14책, 203쪽). 무책임한 변명이었다.

 

팍팍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신진사류는 현실비판을 이어나갔다. 중종 5년 11월21일. 아침 경연에서였다. <중용>의 ‘구경장(九經章)’을 강론했는데, 신진사류의 대부 격인 최숙생이 비판의 강도를 높였다. 그는 연산군 때 사화에 얽혀 유배된 경력이 있는 관리였다. 최숙생의 주장은 이러했다.

 

‘아무리 어려운 처지라도 대신은 선(善)을 추구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요즘 대신들은 어떠한지요. 임금님은 왜, 무능하고 게으른 대신들을 공경하십니까?’

 

최숙생은 낡고 잘못된 제도를 고칠 생각이 없는 대신들을 성토했다. 그의 말을 들은 많은 선비들이 통쾌하게 여겼을 법하다. 하지만 최고의 권한을 손에 쥔 중종은 잠자코 듣기만 하였다(조선왕조실록, 14책, 476쪽).

 

중종에게는 대신들의 이기적인 주장을 꺾을 의지도 능력도 없어보였다. 그로부터 5년쯤 지나자 중종은 갑자기 조광조를 등용했다. 개혁정치를 벌이려는 듯하였다. 하지만 결국 기묘사화(1519)로 그 종지부를 찍었다.

 

개혁을 추구하던 조광조 등이 조정에서 축출되자 대신들은 더욱 노골적으로 아전인수(我田引水)에 불과한 주장을 늘어놓았다. 중종 22년(1527) 8월12일, 아침 경연에서 대신 이항은 아무 거리낌도 없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중용>에선 대신을 공경하라 하였고, <논어> 역시 대신의 뜻을 따라 원망이 없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임금은 대신의 말을 중시하는 게 옳습니다.’ 일종의 훈계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보다 얼마 전에 대신 이승겸이 뇌물을 받은 사실이 확인되었다. 대신들은 이승겸의 지위를 고려해서 경미한 처벌로 끝내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간이 이 문제를 파고들자 중종은 잠시 머뭇거렸다. 이항은 바로 그 점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의 논리는 이런 것이었다. 국정을 논의하는 임무는 대신들에게 있으므로, 그들을 소홀히 대접하면 국가의 기강이 흔들린다. 과거 조광조 등 신진사류가 대신들을 업신여기고 국정을 좌지우지한 결과 나라가 큰 혼란에 빠졌었다. 그런 잘못이 되풀이되지 말아야 한다.

 

중종은 이항의 지적이 옳다면서 자신의 우유부단한 행적을 굳이 변명했다(조선왕조실록, 16책, 588쪽). 500년 전 일인데 내 눈에는 왜, 자꾸 현실과 겹쳐 보이는 것일까.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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