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근대 일본의 묻혀진 목소리들

경향신문 2021. 6. 10. 09:46

근대 일본의 아시아 침략은 제국주의 시대였던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그럴까. 청일전쟁이 시작되자 대부분의 일본 지식인들은 환호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문명과 야만의 전쟁’이라 했고,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조차도 ‘의전’으로 칭송했다. 청에 맞서 조선을 ‘독립’시킨다는 명분이었다. 승전 후 일본은 조선 독립은커녕 세력을 더 확대하기 위해 군비 증가에 열을 올렸다. 이때부터 침략에 반대하는 ‘비전론’이 터져 나왔다. 사회주의자 고토쿠 슈스이는 “장수는 끊임없이 전과를 올리지만 국민에게는 쌀 한 톨 생기지 않는다. 무력의 위세를 사방에 떨친다지만 국민은 한 벌의 옷도 얻지 못한다”며 전쟁을 위한 증세를 비난했다. 기독교도 아베 이소오는 비전론이 공상에 불과하다는 비판에 맞서 “한쪽이 먼저 멈추지 않으면 전쟁이 끝나는 때는 오지 않는다. 만약 평화가 올바른 길이라면 평화를 세계에 선언하고 그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해도 상관없지 않은가”라며 마치 전후의 평화헌법체제를 예견한 듯한 발언까지 했다.

 

이들의 경고에도 일본 정부는 러일전쟁을 감행했다. 기관총 같은 대량살상무기와 참호전이 등장하며 현대전의 시초가 된 이 전쟁에서는, 청일전쟁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를 본 여성 시인 요사노 아키코는 승전에 취한 일본 사회에 충격적인 시를 던졌다.

 

“… 아우여 죽지 말아라. 뤼순이 함락되든 함락되지 않든 무슨 상관이냐… 천황폐하는 자기는 전쟁에 나가지 않으면서, 서로 사람의 피를 흘리며 짐승처럼 죽어라, 그게 인간의 명예다라고는, 생각이 깊으신 분이니, 그렇게 말씀하셨을 리가 없다….” 천황까지 거론한 이 시는 즉각 ‘난신적자’로 매도당했다.

 

비전론이 너무 이상적이라면 이건 어떤가. 러일전쟁 후 일본 군부는 ‘제국국방방침’을 만들어 대륙 진출과 대규모 육군 건설을 계획했다. 이 때 해군대학 교관 사토 데쓰타로는 <제국국방사론>을 써서 이를 비판했다(박영준 ‘러일전쟁 직후 일본 해군의 국가국상과 군사전략론: 사토 데쓰타로의 <제국국방사론>을 중심으로’). 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군대의 존재 이유는 타국을 침략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평화와 통상을 유지하는 데 있으니, 일본은 열도 방위에만 전념하면 된다(방수자위). 수백만의 육군을 대륙에 파병하는 것보다, 한반도 침략을 단념하고 대신에 조선과 청의 육군 양성을 도와주어 러시아에 대항케 하는 게 좋다. 그 좋은 예는 바로 영국이다. 영국은 불과 4만~5만명의 육군만을 유지하며 유럽 대륙에 간섭하지 않고, 대신에 해군 증강에 힘써 지금과 같은 강대국이 되었다. 일본은 영국의 전략을 취해야 한다.

 

러시아가 한반도를 장악하면 일본이 위험에 처할 거라는, 당시 유행하던 반론도 일축했다. “어느 나라도 해상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그 육군을 일본 영토에 침입시킬 수 없다. 설령 세계 열강이 연합해 수백만 육군을 거느리고 우리 해안가에 이른다 해도 우리 연안에 수송할 수 있는 군비, 즉 우세한 해군이 없다면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하물며 가까운 장래에 수백만의 대육군이 청과 한반도에 집결할 거라는 것은 몽상에 지나지 않는다.” 합리적인 전략이다. 이순신 장군을 깊이 흠모했던 사토는 이렇게 군 수뇌부와 맞섰다.

 

일본 군부는 사토의 전략이 이상론이라며 <제국국방사론>이 나온 지 2년 만에 한국을 병합했다. 그것은 육군 대확장의 길로 들어선 걸 의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간도에도 시베리아에도 육군이 파병됐다. 만주사변도 일어났고, 중일전쟁도 일으켰다. 수백만명의 병력이 해외에서 전쟁을 했다. 이미 일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결국 1941년 12월 일본은 진주만에서 문자 그대로 ‘자폭’했다. 이를 지켜보던 사토는 종교에 귀의해 재산을 헌납했으며 일본 ‘자폭’ 석 달 후 세상을 떴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