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칼럼

[기고]2·8독립선언의 주역 최팔용

경향신문 2020. 2. 5. 11:13

1919년 2·8독립선언은 우리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페이지로 기록된다. 이어진 3·1운동 등 국내 항일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상해 임시정부 수립 등으로 이어지는 기반이 됐다. 또 독립운동이 민족 전체의 관심사로 부각되면서 독립운동의 열기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이런 의미에서 2·8독립선언은 높은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도쿄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한 최팔용을 비롯해 김도연, 송계백, 이종근, 전영택, 윤창석, 김상덕 등 2·8독립선언문에 서명했던 11인의 서명자들에 대한 연구는 아주 미흡한 수준에 머물고 있어 안타깝다. 


특히 2·8선언의 리더였던 최팔용은 거의 잊혀진 독립운동가이다. 2·8독립선언은 1919년 2월8일 일본에 유학 중이던 한국인 남녀학생들이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서와 결의문을 선포하고자 했던 운동이다. 당일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한국유학생 대회를 열고, 600여명이 모인 자리에서 최팔용이 대표로 나가 이광수가 작성한 선언서와 결의문을 낭독, 만장일치로 가결하여 일본의회에 청원서를 제출하려다가 일본경찰의 제지로 실패했다. 최팔용은 함경남도 흥원 출신으로 일본 와세다대학 재학 중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해 조선청년독립단의 결성을 주도했다. 2·8선언 당시 투옥되어 힘겨운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감했지만 그 후유증으로 인해 1922년 3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 정도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런데 독립운동가 두산 이동화 선생의 생전 육성회고와 육필원고 등의 자료를 보면 최팔용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는 내용이 담겨있다. 최팔용은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가 깊었고 일정 부분 사회주의를 수용했다는 내용이다. 당시는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사회주의 사상이 밀려들어왔던 시기이므로 사회주의를 수용한 사실 자체는 크게 주목할 사항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이동화의 회고에는 최팔용은 사회주의를 수용하기는 했지만 공산주의의 혁명적·폭력적 요소들에 대해서는 큰 거부감을 가졌다고 밝히고 있다. 이 점은 상당히 중요한 사항이 될 수 있다. 일제하 러시아혁명 등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사상은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독립운동가들 중 상당수는 공산주의로 기울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당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 중 사회주의의 혁명적·폭력적 노선에 거부감을 가지고 보다 온건하고 민주적인 노선, 즉 민주적 사회주의 내지는 사회민주주의를 모색한 인물들이 소수이긴 하지만 분명히 존재했었다. 대표적으로 여운형과 조봉암 그리고 이 글에서 언급한 이동화 등이었다. 최팔용이 이러한 범위에 포함된다고 한다면 이는 매우 중요한 해석이 될 수 있다. 특히 이동화 선생은 최팔용의 사위였다는 점에서 그 증언에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이동화가 북에서 월남할 때 함께하지 못한 부인이 바로 최팔용의 딸이었다. 


2·8독립선언 101주년을 맞아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2·8독립선언의 주역들, 젊은 영웅들에 대한 면밀한 연구가 진행되기를 기대한다. 이들 모두 우리 근현대사의 중요한 인물로 자리매김하는 데 부족함이 없는 인물들이다.


<이인국 | 이동화선생기념사업회 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