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나이와 역사

경향신문 2021. 9. 2. 09:56

역사를 읽을 때 등장인물의 나이를 염두에 두려고 노력한다. 보통 나이는 안 쓰여 있기 때문에 따로 신경을 써야 한다. 살다보면 한 인간의 생각이나 행동을 결정하는 데 나이나 그가 속한 세대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게 된다. 역사상의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몇 살이었는지, 이하응은 대원군으로 집권할 때 어느 정도 나이였는지를 감안하며 책을 읽으면 더 실감난다. 이하응은 44세에 그 자리에 올랐으니 권력욕은 끝을 몰랐을 것이다. 명성황후는 이때 23세. 이 나이로 시아버지에게 대들었으니 그 배짱과 캐릭터를 짐작할 만하다.

 

갑신정변 당시 두령 김옥균은 33세였고 박영효(23), 서광범(25), 홍영식(29) 등 쿠데타 멤버들은 모두 20대였다. 당시의 평균수명을 감안하여 지금으로 치더라도 30, 40대들의 정변이었다. 고종(32)이 개화정책에 관심을 보이고 잠시 이들에게 동조했던 것도 ‘세대담론’ 차원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위정척사파 어르신(꼰대)들이 봤을 때 갑신정변은 ‘꼬마들의 불장난’이었을 게다.

 

‘꼬마들의 불장난’이 멋지게 성공한 경우도 있다. 메이지 유신 발발(1868) 당시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등 유신 삼걸은 모두 30대 중후반이었다. 유신의 스승으로 널리 알려진 요시다 쇼인은 1859년 처형당할 때 29세, <료마가 간다>의 사카모토 료마는 1867년 암살당할 때 31세였다. 이토 히로부미가 1870년 공부경(工部卿)으로 내각의 한 축을 차지하게 되었을 때에도 불과 28세였다. 당시 기성세대의 정치가·학자들은 이들의 주장을 ‘신기지설(新奇之說)’이라고 일축했지만, 이 젊은이들의 무모해 보이는 모험과 도전이 세상을 움직였다.

 

나이를 생각할 때 흥미가 가는 것은 일찌감치 인생의 정점을 찍은 사람들의 후반생이다. 젊은 날에 퇴위한 왕, 실각한 권력자, 패배한 정치가들이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거의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 삶이 더 이상 역사적 의미를 갖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48세의 한창 나이에 폐위된 광해군은 1641년 67세로 죽기까지 거의 20년을 더 살았는데, 그사이에 강화, 태안, 제주도로 유배지를 옮겨가며 역모사건에 연루되기도 하지만, 역사에서는 더 이상 그를 주목하지 않는다. 이 20년간 광해군이 과연 무슨 생각과 감정으로 살아갔는지, 생각하면 기막힌 인생이 아닐 수 없다. 역사학에서는 외면한다 해도 문학이나 다른 분야에서 좀 다뤄주면 어떨까.

 

역사의 현장에서는 사라졌지만 그 후 인생이 이 사람만큼 행복했던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도쿠가와 막부 마지막 장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다. 유신 삼걸과 건곡일척의 권력투쟁을 벌이던 당시, 그의 나이는 31세로 유신 삼걸보다도 어렸다. 1860년대는 이 30대 청년정치가들이 불꽃 튀는 머리싸움을 벌이던 시기였다. 기도 다카요시는 “마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재림한 것 같다”며 요시노부의 정치력에 혀를 내둘렀지만, 결과는 막부의 패배였다. 요시노부는 시즈오카에 은거했고 세상은 유신 삼걸이 지배했다. 그러나 권불십년이라 했던가, 유신 발발 후 10년 만에 삼걸은 모두 죽었다.

 

반대로 요시노부는 세상 즐겁게 살았다. 수렵, 매사냥, 투망에서부터 바둑, 장기, 그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취미에 빠져들었다. 사진 찍기에 맛을 들이고부터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온천과 사진촬영에 여념이 없었다. 물론 측실들과 동행이었고 그들 사이에서 스무 명이 넘는 아이를 낳았다. 유신 삼걸의 비명횡사에 감개를 느낄 틈도 없었을 것 같다.

 

유신발발 30년 만인 1898년에는 마침내 메이지천황을 배알했고, 공작 작위도 받아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정치에는 눈 돌리지 않았다. 자전거가 나오면 사이클을 하고, 자동차가 수입되면 드라이브를 즐겼다. 그가 죽은 것은 1913년으로 향년 76세. 유신 삼걸은 물론이고 메이지천황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누가 인생의 승자일까.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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