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대입, 공정한 지옥?

경향신문 2019. 12. 5. 11:21

밤 10시가 넘은 시각, 분당 정자동 앞을 지나는데 차들이 도무지 움직이질 않았다. 출퇴근 시간에도 좀처럼 막히지 않는 왕복 10차선 도로다. 사고라도 났나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도로 가장자리 2개 차선은 학원을 마친 학생들을 기다리는 학원 버스와 자가용으로 주차장이 되었다. 그러고도 주차할 자리를 찾지 못한 차들이 세 번째 차선마저 주차장으로 만들려는 판국이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 많은 버스와 자가용에 태울 수 있는 인원의 수십 배 학생들의 인파가 지하철역으로, 버스정류장으로 무리지어 움직이고 있었다. 흡사 프로야구 경기가 끝나고 수만 관중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안양 평촌동에서도 비슷한 광경을 본 적이 있다. 정자동과 평촌동은 경기 남부에서 손꼽히는 학원가다. 경기가 이 정도니 서울은 오죽할까.


내가 본 것은 전국 각지의 학원가에서 매일처럼 반복되는 광경이다. 어제오늘 일도 아닌데 새삼스럽지도 않다고 할지 모르겠다. 문제는 나아질 기미는커녕 갈수록 심해지기만 한다는 사실이다. 나도 알고 있다. 나 역시 언젠가는 내 자식을 저 북적이는 무리 속에 밀어넣어야 하는 운명이라는 것을. 


수많은 학생들이 무엇을 위해 저 고생을 하는가. 목적은 단 하나, ‘스카이 캐슬’ 입성이다. 저렇게 열심히 공부를 해도 모두가 목적을 이룰 수 없는 것이 입시지옥의 현실이다. 남보다 앞서기 위해서는 한시라도 빨리 제 발로 지옥에 뛰어드는 길밖에 없다. 요즘은 초등학생도 밤늦게까지 ‘학원 뺑뺑이’를 면치 못하는 신세다. 전부 그렇다고는 못해도 더 이상 특수한 사례는 아니다. 초등학생이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오늘날의 교육현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이 아니다. 하지만 쉽게 바뀔 것 같지는 않다. 무엇보다 장기적 교육정책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암담하다.


교육을 ‘백년대계(百年大計)’라고 한다. “1년의 계획은 곡식을 심는 것이 제일이고, 10년의 계획은 나무를 심는 것이 제일이며, 평생의 계획은 사람을 심는 것이 제일이다.” <관자(管子)> ‘권수편(權修篇)’에 나오는 말이다. 장기적인 계획의 필요성을 강조한 말로 알려져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백년대계의 진의를 파악하려면 그 뒤에 이어지는 내용을 보아야 한다. 


“하나를 심어 하나를 수확하는 것은 곡식이고, 하나를 심어 열을 수확하는 것은 나무이며, 하나를 심어 백을 수확하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에 대한 투자는 백 배의 수익을 거둔다. 다만 시간이 필요하다. 결국 ‘백년대계’는 장기적인 교육 투자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투자가 없으면 제아무리 거창한 계획도 소용없다. 백년대계는 돈이 든다. 가계 소득의 상당 부분을 교육비로 지출하는 이유다.


교육은 국가의 백년대계이기도 하다. 하지만 국가 입장에서 교육 투자는 금방 효과가 나타나지 않으므로 소홀히 하기 십상이다. 불확실한 미래에 투자하기보다 즉각적인 효과가 나타나는 방법을 찾으려 한다. 효과가 빠른 것은 교육이 아니라 시험이다. 그러나 시험이 교육을 지배하면 결국은 교육을 망치고 만다. 일찌감치 과거제를 시행한 중국과 한국의 교육이 오히려 후진성을 면치 못한 이유가 이것이다.


중국의 과거제도를 연구한 미야자키 이치사다에 따르면, 명·청대의 학교는 이름뿐이었고 실질적인 교육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과거시험이 학교를 집어삼켰기 때문이다. 국가는 사실상 학교를 방치했다. 이유는 돈이다. “과거를 실시하는 데 돈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학교 교육에 비하면 훨씬 싸게 먹힌다.”(<과거 - 중국의 시험지옥>) 교육 투자에 인색한 정치와 시험으로 교육을 통제하려는 정책이 학교를 죽이고 말았던 것이다. 이 점은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날에도 국가의 교육 투자는 여전히 인색하다. 고등교육 예산은 여전히 OECD 평균을 밑돈다. 대학만 가면 그 뒤는 알아서 하라는 말이다. 이러니 대학입시가 초미의 관심사일 수밖에. 입시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는 교육현장, 정권이 바뀔 때마다 흔들리는 교육정책, 이것이 우리 교육의 현실이다. 학생과 학부모로서는 오락가락하는 교육정책을 믿느니, 지난 수십년간 흔들림 없었던 학벌체제의 지속을 믿는 것이 당연하다.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야말로 확실한 ‘백년대계’라는 그들의 믿음은 종교에 가깝다. 


대학입시가 국민적 관심사인 만큼, 정부도 공정을 요구하는 여론에 응답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주요 대학의 정시 비율을 조금 늘리는 수준에 그친 ‘대입제도 공정성 강화 방안’은 당장의 효과조차 의심스럽다. 이런 게 교육개혁이라면 실망이 크다. 불공정한 지옥이 공정한 지옥으로 바뀐다 한들, 지옥이기는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1년 뒤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도 모르는 마당에 100년을 내다보고 계획을 세우라는 말은 비현실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며 손놓고 있을 일이 아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지금이야말로 교육의 목적과 방향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지옥은 앞으로 수십년간 계속될 것이다. 지난 수십년간 그랬던 것처럼.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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