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동래 할머니

경상도 동래부(현 부산)에 한 여성이 있었는데 극심한 가난을 이기지 못해 몸을 팔아 겨우 끼니를 이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어났다(선조 25년, 1592). 왜적이 온 나라의 보물을 훔쳐갔는데, 그들은 여성들도 닥치는 대로 붙들어갔다. 동래의 불쌍한 여성은 이미 30여 세도 넘었으나 일본으로 끌려가 10여 년 동안 온갖 험한 일을 하며 살았다. 미수 허목이 쓴 ‘동래 할머니’란 글에 이 여성의 기구한 사연이 실려 있다(<기언>, 제22권).

선조 39년(1606) 기유년 봄, 조정에서는 일본과 조약을 맺어 억울하게 끌려간 포로를 데려왔다. 다행히 동래 출신인 그 여성도 사신 일행을 따라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일본에 억류되어 있던 중에도 자나 깨나 한 가지 소원이 있었다. 연로한 어머니를 상봉하는 것이었다. 왜란 중에 억지로 헤어진 이후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인 여성은 오직 모친을 그리워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하였다.

그러나 이 웬일인가. 어머니 역시 왜적에게 끌려가신 것이 분명하였다. 난리의 와중에 두 모녀는 모두 적국에 포로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그런 줄도 모르고 고향의 어머니만 그리워하였던 셈이다. 수소문 끝에 자신의 어머니가 일본으로 끌려간 사실을 확인한 여성은 단호한 결정을 내렸다.

“어머니를 찾지 못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 친지들에게 이렇게 맹세하고, 그는 다시 온 재산을 털어서 배를 구해 타고는 일본으로 갔다. 그는 걸인 노릇을 하며 일본 땅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하였다. 전쟁 포로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면 한 곳도 빠뜨리지 않고 찾아가서 어머니의 행방을 묻고 또 물었다. 하늘도 무심하지 않았던가. 드디어 어머니를 찾아낸 그는 목놓아 울었다. 딸의 나이도 이미 50을 넘겼고, 어머니는 70세도 훌쩍 넘었다. 모녀 모두 노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사정을 알게 된 일본 사람들도 놀라서 절로 눈물을 흘리며 딸의 효성에 감탄하였다. 그들은 차마 두 모녀가 조선으로 귀국하는 것을 가로막지 못하였다. 천신만고 끝에 두 사람은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아무런 재산도 없어 살길이 막연하였다. 늙은 딸은 좌절을 몰랐다. 그는 고향에 남아 있던 언니와 함께 늙은 어머니를 업고 낙동강을 건너 깊은 시골로 들어갔다. 그들은 함안 방목리에 여장을 풀고 날마다 품팔이에 나서, 어머니를 정성껏 봉양하였다. 세월은 흘러 어머니도 언니도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도 80여 세까지 살다가 사망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동래 할머니’라고 불렀고, 그의 효행을 후세에 널리 알렸다.

이런 이야기를 전하며, 허목은 자신이 느낀 바를 이렇게 기록하였다. “만리타국 험난한 바닷길을 넘어서 모녀가 다시 만날 수 있었다니, 정녕 하늘이 돌보셨네. 남성이라도 하지 못할 일을 해내어, 세상에 다시없는 효행으로 모범이 되셨도다. 일본 사람까지 감화되었으니 참으로 어질지 않은가.”(‘동래 할머니’)

이 이야기는 개성이 뚜렷한 한 평민 여성의 생애사이면서도, 거기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15세기 조선에서는 진보적인 성리학자들만 유교적 윤리와 도덕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성리학적 전환’이란 거대한 프로젝트에 발동을 걸었다. 이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이가 다름 아닌 세종대왕이었다. 왕은 누구나 성리학적 도덕을 배워서 실천에 옮기는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삼강행실도>를 간행하고, 한글까지도 창제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런 노력이 헛되지 않아, 16세기 후반에는 각계각층이 모두 유교 도덕의 가치를 내면화하였다. 이제는 평민과 천민도 충효를 실천하고자 물불을 가리지 않아, 마을마다 효자와 열녀 또는 충신이 쏟아져나왔다. 만약 지하의 세종이 우리 동래 여성의 효행을 알게 되었으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그러나 극단적으로 도덕을 강조하는 세상치고 위선적이지 않은 곳이 있는가. 내 마음이 몹시 씁쓸하다.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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