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마늘이 알려준 이야기의 힘

미국에서 ‘파머스 마켓’에 간 적이 있다. 저렴하고 복작대는 시장 구경을 기대하며, 일정과 장소를 확인하려고 본 파머스 마켓의 홈페이지는 뭔가 예상과 달랐다. 아주 거창한 임무와 비전을 제시하며 특별한 척한다는 느낌을 준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 동네 파머스 마켓의 임무는 이러했다. “농산물을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할 시장을 제공함으로써 작은 지역 농장을 지원하고, 도시민에게 이벤트를 제공하여 공동체를 활성화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비전은 더 거창했다. “사회적으로 공정하고 환경적으로 지속 가능한 시스템을 이끌고 지지하는 것”이다. 아니, 동네 파머스 마켓 ‘주제에’ 뭐 이리 비전이 거창하단 말인가! “공정 사회”, “지속가능한 환경 시스템” 같은 것은 대통령 신년사에서나 나오는 말 아닌가?

거창한 비전에 걸맞게 이곳의 물건들은 무언가 특별했다. ‘삼대째 내려온 가족 농장’ 같은 내력을 걸고 파는 육고기는 모두 방목해서 키운 것이고, 종까지 구분한 연어는 자연산이며, 계란은 당연히 방사란, 농산물은 유기농재배가 기본이었다. 자기 농장 티셔츠와 현수막을 자랑스럽게 내건 매대를 돌아보다 보니 점점 나도 이들의 임무와 비전에 같이 고양되는 느낌이었다. 내가 사는 이 방사란 12개는 동물권을 지키고, 현금만 받는 고집불통 할아버지가 파는 방목 소고기 스테이크는 탄소 배출을 감소시켜 지구 환경을 구할 것이다!

이런 기분에 휩쓸려 장바구니에 몰아 담던 중 매대 하나가 눈에 띄었다. 마늘 전문 매대였다. 전시장처럼 단을 만들고 스페인산, 폴란드산, 시베리아산 마늘을 딱 한두 뿌리씩 올려놓은, 고급스러워 보이는 매대. 안 그래도 맛도 향도 밍밍한 미국의 마늘에 불만이 가득하던 터에 이 매대를 보니 드디어 ‘진정한 마늘’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더구나 지구 환경과 인류의 건강을 책임지는 파머스 마켓이 아닌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손에는 시베리아산 마늘 한 뿌리가 곱게 담겨 있었는데, 그 가격이 자그마치 10달러였다. 한 뿌리 10달러이니, 깐마늘 한 톨은 우리 돈 1200원이 넘는다. 도대체 마늘의 민족 한국인이 한 톨 1200원짜리 마늘로 어떻게 산단 말인가? 환웅이 곰과 호랑이에게 준 마늘이 이 가격이었으면 일찌감치 파산하고 말았을 것이다.

내가 파머스 마켓의 임무와 비전에 혹하지 않았다면, 분명 이 가격의 마늘을 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들의 이야기에 매료돼 있었기에 홀린 듯이 지갑을 열었다. 이게 이야기의 힘이다. 인간을 매혹시키고 설득하며 이해시키는 힘. 마늘 농부와 나와 전 지구를 연결시키는 힘 말이다.

이야기는 본 적도 만난 적도 없는 사람과 나를 연결시킨다. 어쩌면 역사가는 이런 이야기의 힘을 가장 먼저 알아본 집단인지도 모른다. 마늘 먹고 사람이 된 곰의 이야기가 이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하나의 민족이라는 상상의 바탕이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뿐이 아니다. 이야기는 권력을 틀어쥔 임금도 협박할 수 있었다. 만 년 후까지 너의 이야기가 남을 텐데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생각해보라는 말은 조선시대 임금이 가장 많이 듣던 말 중 하나였다.

역사가는 이야기의 힘과 무서움을 알아보았기에 그 힘의 책임감도 중시한다. 그래서 사실에 집착하고 바른 가치에 집착한다. 집착한다고 해서 다 잘한다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런데 비단 역사가만 이럴 일인가? 이야기를 다루는 사람이라면 모두 이러한 책임감을 가져야 하지 않나? 인간은 많이 듣는 이야기에 혹하게 되어 있기에 듣는 이야기가 무엇인지에 따라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움직일 수 있다. 미래가 불투명하고 온갖 이야기로 어지러운 요즘, 이야기는 인간의 나아갈 바를 고려해야 한다. 그 어느 때보다 이야기를 다루는 사람들의 책임감이 절실하다.


장지연 대전대 H-LAC대학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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