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서울의 열 가지 풍경

지난달 국립한국문학관이 공개한 <한도십영>은 1479년 금속활자 초주갑인자로 인쇄한 보물급 문화재다. 조선 초기 서울의 열 가지 풍경을 노래한 시 90편을 엮은 책이다. <동문선> 책임 편집자로 20년간 문단 권력을 장악한 서거정을 비롯해 강희맹, 이승소, 성현, 월산대군 등 내로라하는 문인들이 제작에 참여했다. 이들이 지은 시는 여러 문헌에 흩어져 전하고 있는데, 한데 묶은 단행본의 발견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책에 실린 서울의 열 가지 풍경을 소개한다.

첫째는 장의사에서 승려 만나기다. 장의사는 북한산 남쪽, 현 세검정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사찰이다. 당시는 공무원 연수원 겸 휴양소였다. 그 앞을 흐르는 홍제천은 도성 밖 최고의 유원지로 손꼽혔다. 둘째는 제천정에서 달 구경하기다. 제천정은 한남역 서쪽에 있던 정자로 한강 최고의 조망을 자랑했다.

셋째는 반송정에서 나그네 송별하기다. 반송정은 서대문구 천연동에 있던 정자다. 한양에서 가장 큰 연못 옆에 거대한 소나무가 우거진 곳이었다. 한양에서 중국으로 이어지는 의주대로의 출발점이므로 오가는 나그네가 끊이지 않았다. 넷째는 양화나루에서 눈길 걷기다. 양화나루는 잠두봉을 등지고 한강을 마주한 곳이다. 한적한 어촌이지만 눈 내린 겨울 풍경이 유난히 유명했다.

다섯째는 남산의 꽃구경이다. 남산은 한양 전역을 조망 가능한 곳이다. 여섯째는 살곶이 봄놀이다. 살곶이는 성수동과 화양동 일대의 한강변이다. 지금은 도심이지만 당시는 교외의 널찍한 봄나들이 명소였다. 일곱째는 마포나루 뱃놀이다. 중국 항주 서호의 경치를 연상시킨다는 이곳에서 소동파를 흉내낸 뱃놀이가 유행했다. 여덟째는 흥덕사 연꽃 구경이다. 흥덕사는 혜화동 서울과학고 앞에 있던 사찰이다. 여름이면 연꽃이 만개하여 관광객으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아홉째는 종로 연등놀이다. 조선시대 연등놀이는 지금처럼 조계종이 기획하는 것이 아니다. 시민의 참여로 이루어지는 축제다. 초파일 밤이면 한양 백성들이 손수 만든 다채로운 연등이 하늘을 수놓았다. 열째는 입석포에서 낚시하기다. 입석포는 지금의 응봉산 아래에 있던 나루다. 우뚝 선 바위가 있었기에 ‘입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물이 맑아 헤엄치는 고기가 보였다고 한다.

<한도십영>이 소개한 열 가지 풍경에 건축물은 없다. 사찰이 두 곳 포함되기는 하지만 크고 화려한 곳은 아니다. 그 주변의 풍경이 아름다워 뽑은 것이다. 개국 초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때는 새로운 수도의 위용을 과시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래서인지 정도전이 <신도팔경>에서 뽑은 서울의 여덟 가지 풍경은 전부 화려한 볼거리였다. 거대한 대궐과 그 앞에 늘어선 관청들, 한강에 줄지어 정박한 조운선, 교외의 드넓은 훈련장과 목장 따위다. 하지만 건국 후 80년이 지나 서울을 바라보는 시각에 변화가 일어난다. <한도십영>이 소개한 서울은 자연의 풍경과 인간의 행위가 어우러져 있다. 거대한 건축물보다는 아름다운 자연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야말로 서울의 진짜 풍경이라는 것이다.

<한도십영>에 등장하는 장소는 대부분 옛모습을 잃었다. 한때 사찰과 정자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남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서울의 산과 강은 그대로다. 고궁 관람과 시장 구경이 고작이었던 외국인 관광객들도 서울의 진면목에 점차 눈을 뜨고 있다. 북한산은 지하철로 갈 수 있는 세계 유일의 국립공원이며, 한강은 세계 어느 도시를 관통하는 하천보다 거대하다. 이처럼 이채로운 풍경이야말로 다른 도시가 넘볼 수 없는 서울의 매력이다. <한도십영>은 증언한다. 500년 전 서울의 생생한 풍경을, 개발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초대형 랜드마크 아니라도 서울은 천혜의 자연만으로 세계에서 손꼽히는 아름다운 도시라는 사실을.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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