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세종시대 전염병 대응

경향신문 2020. 2. 6. 13:39

불가피하게 동네 병원에 갈 일이 생겼다. 오랜만에 다시 보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의료진은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고, 메르스 사태 때 보았던 손 소독제도 보인다. 대기실에서 누군가 가벼운 기침을 하자 간호사가 놀라며 급히 마스크를 가져온다.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 잠시 긴장이 흐른다. ‘저이가 혹시 중국을 다녀온 사람은 아니겠지.’ 표정으로 보면 누구나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하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요즘 분위기로 미루어보면 내가 병원에 온 것이 좀 잘못된 것 같다. 이렇게 가벼운 감기 증세라면 차라리 집에서 휴식하는 편이 옳았다. 급하지 않은 일에 병원을 찾은 내가 잘못이지만, 이미 나는 와 있지 않은가.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600년가량 시간을 거슬러 세종의 시대로 되돌아가 있었다.


15세기 그때도 돌림병이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사정은 더더욱 심각했다. 해마다 ‘온열(열병)’과 ‘역질(유행성 질환)’ 또는 ‘여역(전염병)’이라 불리는 질병이 나라를 휩쓸었다. 더하고 덜하고의 차이는 늘 있었다. 그러나 심할 때면 불과 한두 달 사이에 전국에서 수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세종이 즉위할 무렵에는 정말 딱했다. 우리 실정에 맞는 의학서적이 단 한 권도 없었다. 중국에서 들여온 의서가 약간 있었으나, 어려운 전문용어로 가득한 한문책이라서 능숙하게 다루는 의원이 거의 없었다. 수백명의 환자를 동시에 효과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종합병원 같은 의료시설도 당연히 부재했다. 그 시절에 의료혜택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 특권층뿐이었고, 인구의 대다수인 평민과 노비는 의료의 사각지대로 내몰렸다.


30여년간 옥좌를 지키면서 세종은 전염병과 계속해서 싸웠다. 왕은 한편으로 의료제도를 확립하고 개선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탁월한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데 많은 정성을 들였다. 또 왕은 여성의 치료를 위해 여의를 선발했고, 그들에게도 순한문으로 된 의서를 가르쳤다. 아울러 세종은 의료혜택이 사회 전 계층에게 고루 미치도록 법률까지 정비했다.


그 결과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눈부셨다. 왕의 시대가 끝날 때쯤이면 계층과 지역 및 성별을 초월해 누구든지 의료혜택을 누렸다. 아무도 건강보험료를 내지 않았으나, 위험한 전염병 같은 것에 걸리면 누구에게든 구원의 손길이 다가왔다.


세종의 시대는 정말 특별했다. 세종 15년(1433년) <향약집성방>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지나칠 수 없다. 이 책의 간행으로 우리의 의학지식이 서너 배나 늘어났다. 또 손쉽게 침과 뜸을 놓는 방법이며, 조선에 자생하는 각종 약초의 약효와 가공법도 이 책을 통해 체계적으로 익힐 수 있었다. 그러나 세종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자신이 키운 조선의 우수한 의학자를 총동원해, 왕은 중국에서 간행된 역대의 의학서적을 총정리하여 규모가 방대한 의학사전을 펴냈다(1445년). 이 책, 곧 <의방유취>의 탄생으로 조선의 의원들은 웬만한 질병은 이길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세종과 그 시대 사람들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데 성공한 것이다.


지금 우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앞에서 덜덜 떨고 있다. 의학이 역사상 최고로 발달한 21세기라고 하지만 전염병의 위세는 줄지 않았다. 기술과 교통이 발달한 까닭에 지구 한쪽에서 발생한 위기는 다음 순간 지구 반대편까지 퍼져나간다. 게다가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오늘날처럼 심한 적이 없었으니 문제가 심각하다. 70억 인구의 상당수가 최저생활을 하는 고로, 전염병 문제는 날이 갈수록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다.


근년에는 기후위기와 극심한 환경파괴로 야생동물마저 건강을 잃었다. 불타버린 호주의 숲속에서 재난을 당한 코알라와 캥거루가 내 눈앞에 어른거린다. 이런 상황이라면 동물의 면역력도 나빠질 게 당연하다. 메르스, 사스, 지카에 이어 코로나까지 괴상한 변종 바이러스의 행렬이 인류의 미래에 짙은 어둠을 준다. 장차 전염병이 가져올 피해는 더욱 커지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만약 세종이 우리 시대에 살아 있다면 그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재벌이나 정치가처럼 정략적인 계산에 매달리지는 않으리라. 그라면 이 문제를 풀 수 있다는 신념으로 합리적인 해결방안을 발견하지 않을까.


<백승종 |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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