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순위 매기기 좋아하는 일본인

도쿠가와 시대(1603~1868)에도 일본인들은 스모에 열광했다. 그래서 전국 스모선수들의 랭킹표를 만들어 일반서민들도 이를 보며 즐겼다. 이 표를 ‘방즈케(番付)’라고 한다. 스모에서 시작된 방즈케는 그 후 다양한 분야로 확산되었다. 온천을 좋아하는 일본인답게 동일본, 서일본으로 나누어 온천 순위를 매겼다. 지금도 간사이, 간토로 동서를 나눠 비교하길 좋아하는 일본인의 지리감각이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동의 오제키(大關, 스모 최고타이틀)는 구사쓰온천, 서는 아리마온천이다. 한국인들이 즐겨찾는 벳푸나 하코네온천은 그 아래 급인 세키와케(關脇)에 랭킹되어 있다. 이 온천들은 지금도 일본을 대표하는 곳들이다. 나도 일본온천을 가볼 만큼 가봤지만, 내게 오제키는 구사쓰온천이다.

방즈케는 실로 다양했다. 요리점, 관광지, 복수(復讐) 외에도 ‘쓸모없는 물건’이나 ‘미녀’ 랭킹도 있었다. 이런 순위표가 엄청나게 인쇄되어 일반서민까지 오락 삼아 즐겼으니, 18세기 무렵에는 대중문화라 할 만한 것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거짓말 방즈케도 있다. 도쿠가와 시대 최고의 거짓말은 뭐였을까. 동쪽의 챔피언은 ‘여자가 싫다는 청년’, 서쪽은 ‘얼른 죽고 싶다는 노인’이었다. 그밖에 ‘비구니가 되고 싶다는 처녀’, ‘밑지고 판다는 장사꾼’…. 어렸을 때 친구들 사이에서도 이 비슷한 얘기를 하며 킬킬거렸던 기억이 있는데 역시 동서고금 인간은 비슷한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유래한 얘기였던가?

양처(良妻)와 악처의 랭킹도 있었으니 이쯤 되면 거의 ‘오타쿠’의 세계다. 양처의 1위는 ‘모든 일에 남편의 지시를 받드는 아내’이고, 악처 1위는 예상대로 ‘질투하는 마누라’다. 그 밖에 남편 험담을 하거나 말이 많거나 유행을 좇는 여자도 악처의 순위에 있다. 남편 방즈케도 있다. 좋은 남편 순위에 ‘술 마셔서 기분이 좋은 남편’이 있다. 어려서 무섭기만 했던 아버지의 퇴근이 반가운 날은 술을 드신 날이었으니, 나는 이 말에 퍽 공감이 갔다. 그밖에 수많은 종목들이 있는데, 인터넷에 ‘江戶時代 見立番付’로 검색해보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런 전통 때문인지 근대일본도 순위에 집착했다. 이번에는 세계 강대국 순위다. “따라가자! 추월하자!(追い付け! 追い越せ!)”는 슬로건 아래 세계에서 일본의 랭킹이 어디까지 왔는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러일전쟁에 이기고, 또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전국이 되자 일본은 세계 5대강국이 되었다며 흥분했다. 그러나 한번 방즈케의 마법에 걸리면 눈에 보이는 건 1위뿐이다. 1위가 되려고 중국·영국·미국·소련과 무모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전쟁을 연이어 일으켰다. 그 결과는 방즈케 탈락이었다.

1995년부터 2021년까지 한국의 1인당 명목GDP는 34위에서 30위로 올랐고, 일본은 3위에서 28위로 대폭 떨어졌다. 스위스 IMD 국가경쟁력 순위에서도 같은 기간에 한국은 26위에서 23위로 약간 올랐으나, 일본은 4위에서 31위로 추락했다. 한국외국어대 이창민 교수가 한 언론인터뷰에서 제시한 수치다. 방즈케 좋아하는 일본인의 입장에서 쓰라린 결과일 것이다. 조선시대부터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보면 한국인들도 어지간히 랭킹을 좋아하는 듯하다. 요즘은 좀 잠잠해졌지만 올림픽·아시안게임에서 방즈케는 전 국민의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역할까지 했었다. 그 대신 최근에는 GDP, 무역규모 10위권, 국방력 6위권 등의 방즈케가 곧잘 눈에 띈다. 가슴이 웅장해지는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국민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 자부심은 간직하되 방즈케의 요술에 걸려드는 일은 없도록 하자.

정 방즈케의 재미를 못 버리겠다면, 도쿠가와 시대의 일본인들처럼 종목을 좀 더 다채롭게 하면 어떤가. 새벽공기와 산책로가 좋은 도시, 인구당 정신병원 숫자, 자동차 경적을 많이 울리는 지역 랭킹 등등.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연재 | 역사와 현실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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