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식민지는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문제?’

경향신문 2021. 3. 18. 09:52

몇 해 전 외신기자단 회견에서 한 일본 기자가 우리 관료에게 “식민지 문제에서 일본이 뭘 어떻게 더 하라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우리 관료는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문제이니 더 이상 설명이 필요치 않다”고 답했다. 악의에 찬 질문에 대해 우리 국민의 감정을 표현한 말이었지만 외신기자들은 두고두고 수군거렸다고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보편적인 여성 인권 문제였던 위안부 이슈와 달리, 식민지 문제는 국제사회의 공감을 끌어내기가 쉽지 않은 이슈다. 세계인들에게는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식민지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입장은 우리와 많이 다르다. 알다시피 제국주의 열강을 제외한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이 식민지가 되었다. 그럼 세계 도처에서 역사문제가 벌어져야 할 텐데 한·일을 제외하고는 잠잠하다. 사실 식민지 역사분쟁은 한·일 간이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국-인도, 프랑스-베트남, 심지어는 일본-대만 간에도 없는 현상이다. 이 특수현상의 배경에 대해 이 칼럼난에 쓴 적이 있다(2017년 7월26일자 ‘조선식민지의 세계사적 특수성’). 국제법도 전쟁에 대해서는 여러 말을 하고 있지만 식민지 문제에는 과묵하다. 국제법을 주도하는 열강이 식민지 문제의 공범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식민지 문제에 관한 한 국내에서 느끼는 체감과는 달리 국제무대에서는 한국이 유리한 처지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야스쿠니신사 문제도 세심하게 다뤄야 한다. 이 이슈의 초점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주도한 A급 전범 14명을 합사한 데에 있다. 상대가 미국과 중국이다 보니 일본도 함부로 하지 못한다. 2013년 아베 전 총리가 참배한 이래 총리 참배는 여지껏 못하고 있다. 현재는 한국, 중국, 미국이 일본을 협공하는 형국이다. 그러나 만일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되나? 일본에 지금보다 리버럴한 정권이 들어서서 A급 전범 위패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다. 아마 미국과 중국은 대환영할 것이고 문제 종결을 선언할 것이다. 한국도 그럴 수 있을까. 야스쿠니신사에는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국병합 과정에서 죽은 병사들이 영령으로 모셔져 있고, 그 안의 유취관(遊就館)이라는 박물관에서는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과정을 미화하는 전시가 버젓이 행해지고 있다. 그 정도가 매우 심하고 노골적이다.

 

일본이 야스쿠니신사에서 A급 전범 위패를 빼내고 그 대가로 야스쿠니신사를 국립묘지화하는 수순을 밟는다면 이번에는 미국, 중국, 일본이 한편에 서고 한국이 고립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미국과 중국이 문제로 삼는 것은 일본의 전쟁행위이지 식민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듯 식민지 문제에 관한 국제환경은 우리에게 녹록지 않다. 식민지배의 불법성 인정과 법적 배상 요구는 일본이 응할 리도 만무하지만, 진짜 그렇게 하려면 과거 식민종주국들의 허락(?)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 여파가 그들에게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원리주의적인 대일자세는 한 치의 진전도 보지 못한 지난 4년여의 상황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바이든 미국 정부가 한·일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한·일 간의 문제가 죽창가나 보이콧, 혹은 혐한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해진 이상, 우리는 다시 준비해야 한다. 역사 문제는 앞으로 위안부 문제와 마찬가지로 점점 국제화될 것이므로 우리의 준비도 세계인을 설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나는 일본 정부에 식민지배를 통렬히 사죄하고 미래 파트너십을 약속한 무라야마 담화(1995)와 김대중-오부치 선언(1998)으로 돌아가라고 촉구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본 정부 자기 입으로 한 말들이니 우리가 압박하기도 좋다. 이제까지 아베 정부도 스가 정부도 이것들을 부정한 적은 없다. 물론 한국 정부도 마찬가지다. 우리 독자들도 인터넷에서 쉽게 볼 수 있으니 한번쯤 이 담화와 선언들을 읽어보자.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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