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안도 다로, 신미양요의 그늘에 숨은 일본의 촉수

경향신문 2021. 11. 18. 10:03

1875년 일본은 운요호사건을 일으켜 마침내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들이 벌인 소동은 그보다 4년 전에 일어난 신미양요를 본뜬 것이었다. 1871년 6월, 미국은 조선 원정을 목적으로 군함 5척을 강화도로 파견했다. 그 당시에는 우리가 몰랐던 사실이지만, 미 군함에는 영어에 능통한 일본 외무성 하급 관리 한 명이 동승하였다. 안도 다로(安藤太郞, 1846~1923)였다.

사건이 벌어지기 석 달쯤 앞서 일본 외무성에서 부산에 주재하던 자국 관리에게 보낸 문서가 우리의 관심을 끈다.

“미국이 군함 몇 척을 그곳으로 파견할 예정이다. 몇 년 전에 해난을 당한 배(셔먼호)를 심하게 다룬 죄를 묻고, 해난구조에 관한 조약을 조선과 체결할 것이라 한다. … 미국에 선수를 빼앗겨서 유감이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미국과 조선 사이에서 적절히 처신하며 이익을 꾀하는 것이 옳다.”

 

이렇게 말하면서 “안도 다로에게 통역과 그 외의 일을 맡겨” 보내므로 서로 잘 협력하라고 부탁하였다.(<일본외교문서> 4, 문서번호 173)

 

안도가 누구인가. 그는 난학(蘭學, 서양학)에 종사하는 집안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천연두를 연구하는 서양 의사였다. 이러한 집안 배경 덕분에 안도는 어려서부터 네덜란드어를 배웠고 커서는 중국어도 학습하였다. 또 그는 일본에 온 미국 선교사 데이비드 톰슨과 새뮤얼 로빈스 브라운에게서 영어까지 익혔다.

 

청년 안도는 해군과 육군 훈련소를 거쳐 에도 막부의 장교가 되었다. 마침 메이지의 왕정복고를 반대하는 ‘보신(戊辰) 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막부 편에 섰다(1868년). 그러나 전쟁에 졌기 때문에 안도는 1년이나 옥에 갇혔다.

 

하지만 외국어에 능통한 그를 메이지 정부는 외면하지 않았다. 1871년 봄, 신미양요가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메이지 정부는 안도를 통역관으로 삼아 미국 함대를 따라가게 하였다. 미국은 이미 2명의 중국인 통역관을 고용하였으나 안도의 종군을 사양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미 전함에 오른 안도는 강화도에서 일어난 사건을 상세히 기록해 본국 정부에 알렸다. 그가 제공한 첩보는 운요호사건 때 일본군의 행동지침이 되었다.

 

안도의 외국어 실력을 높이 산 메이지 정부는 그를 중용하였다. 1871년 12월,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가 장차 일본의 운명을 걸머질 대규모 시찰단을 이끌고 여행을 떠났다. 일본 고위 관료와 유학생 등 총 107명을 실은 기선이 우선 미국으로 출발하였는데, 안도 다로는 4등 서기관으로서 통역을 맡았다. 알다시피 이 시찰단은 철저한 현지 조사 활동을 벌인 끝에 일본의 근대화 작업에 필요한 청사진을 완성했다.

 

안도는 중임을 무난히 잘 수행하였다는 평가를 받아 귀국 후에는 홍콩주재 부영사가 되었다(1874년). 나중에는 중국에서도 가장 요지인 상하이의 총영사를 거쳐 다수 일본인이 이주한 미국 하와이의 초대 총영사까지 지냈다. 그는 1894년 외무성의 요직인 상무국장도 역임하였다. 본래 안도는 한 사람의 난학자였으나 어학 실력에 힘입어 일본의 조선 침략과 근대화에 큰 역할을 담당한 셈이다.

 

그는 본래 알코올중독자였다. 그런데 하와이에 근무할 때 기독교로 개종하여 술을 끊었고, 1890년에는 금주(禁酒) 동맹을 조직하였다. 후세는 그를 성공한 외교관이요, 선교사업가이자 금주 운동가로 기억한다(<안도기념교회 칠십년사>). 공식적인 전기에는 안도가 신미양요 때 통역관이자 첩자로서 활동하였다는 사실을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일본 군국주의가 한국과 중국을 침략하는 과정에는 안도 다로 같은 협력자들이 많았다. 역사의 이면에는 크고 작은 사연이 숨어있기 마련이다. 현재 우리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굵직한 사건이라 해서 무엇이 다르겠는가. 어떤 사건이든 조금 더 깊이 파보면 의외의 인물이 어딘가에 숨어있기 마련이다. 세상이 다 아는 것 같아도 그것은 언제나 빙산의 일각이다.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