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칼럼

[여적]문화재 지정번호 폐지

경향신문 2021. 2. 10. 09:50

국립중앙박물관 일제강점기 유리건판사진으로 남은 숭례문 전경. 조선총독부가 부여한 문화재 지정번호가 80년 이상 답습해왔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누구나 한번쯤은 ‘우리나라 국보 1호는 무엇이냐’는 문제를 접했을 것이다. 정답은 물론 ‘남대문’이다. 지금은 숭례문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남대문은 누구나 기억해야 할 부동의 ‘국보 1호’였다. 그래서 숭례문은 국보 중에서도 최고의 가치를 지닌 문화재로 은연중 여겨졌다.

 

20여년 전 국보 1호 논쟁이 뜨겁게 일었다. 학계 일부가 훈민정음이나 석굴암, 불국사, 다보탑, 팔만대장경과 같은 문화재를 국보 1호로 재지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격론을 벌였지만 훈민정음 해례본이 국보 1호감으로 적당하다는 의견과 숭례문을 국보 1호로 둬야 한다는 주장이 맞섰다. 1996년에는 정부가 시민들을 상대로 국보 1호 재지정 여부를 물은 적도 있다. 전국의 남녀 1000명이 여론조사에 참여했는데, 훈민정음을 국보 1호로 지정하자는 데 반대가 67.6%, 찬성이 32.4%였다. 숭례문을 계속 국보 1호로 두자는 의견이 다수로 나온 것이다.

 

국보 1호 논쟁이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됐다. 문화재청이 8일 정부 업무보고에서 문화재 지정번호를 없애겠다고 밝혔다. “문화재를 서열화하는 사회적 인식, 잦은 변경 요구와 논쟁을 불식하기 위해 문화재 관리번호로 운영을 개선한다”는 것이 취지다. 이에 따라 모든 공문서나 인터넷 홈페이지 등에서 ‘국보 ○○호’라는 표기는 사라진다. ‘국보 1호 숭례문’이 그냥 ‘국보 숭례문’이 되는 것이다. 교과서와 도로표지판, 안내판 등에서도 마찬가지다. 기존의 번호는 내부에서 관리용으로만 사용된다.

 

당초 국보 1호는 1934년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편의상 보물 1·2호로 남대문과 동대문을 지정한 데에서 시작됐다. 이것이 1962년 문화재보호법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관례대로 국보 1호 남대문, 보물 1호 동대문 등으로 지정번호를 매기면서 굳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60년 만에 지정번호가 폐지되는 것은 어떤 문화재건 그 나름대로의 역사적 가치, 미적 가치에 따라 봐야 한다는 점을 일깨운다.

 

문화재에서 어느 것이 최고냐는 질문은 우문일 뿐이다. 그런 문화재에까지 서열을 매긴 것은 우리 사회에 서열 의식이 그만큼 뿌리 깊게 박혀 있다는 방증이다. 당연한 일을 바로잡는 데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윤호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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