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이 관동도독부 법원과 감옥이 있는 뤼순으로 압송된 것은 1909년 11월3일이었다. 하얼빈 의거 1주일 만이었다. 이후 안중근은 이듬해 3월26일 순국하기까지 143일간 뤼순감옥에 있었다. 일제는 안중근을 특별대우했다. 일반 형사범이 아닌 국사범처럼 대했다. 안중근은 떳떳하게 의거 사실을 인정했다. 일본 관헌은 당당한 안중근의 인격에 감화됐다. 필기구를 제공하며 자서전을 쓰도록 권했다. 안중근 자서전 <안응칠 역사>는 옥중에서 탈고됐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론’도 저술했다. 그는 이 글을 통해 어떻게 독립운동에 투신했는지, 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는지를 밝히고 싶었다. 옥중 투쟁을 논리적으로 정리하고자 하는 뜻도 있었다. 그러나 저술이 끝나기도 전에 법원은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는 고등법원장을 면회해 항소를 포기하는 대신 ‘동양평화론’이 완성될 때까지 사형집행을 늦춰달라고 했다. 일제는 그의 간절한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선고 한 달여 만에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을 저술하면서 서문, 전감(前鑑), 현상, 복선(伏線) , 문답으로 목차를 정했다. 그러나 형 집행으로 ‘전감’에서 멈춰야 했다. 미완성이지만 ‘동양평화론’은 안중근 평화사상의 핵심을 담았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를 위해서는 한반도와 만주를 침탈하려는 일본의 침략주의를 막아야 한다고 했다. 일본이 침략의 야욕을 버리고 한국, 중국과 합심해 서양 침략세력을 방어할 때 동양평화는 물론 세계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했다. ‘동양평화론’은 안중근 독립운동 철학의 정화로, 세계 평화사상으로 연결된다.


1909년 3월26일 오전 10시. 뤼순 감옥 교수대에 오른 안중근은 일본 관헌들에게 이토 히로부미 사살은 동양평화를 위한 충심의 발로라고 말했다. 그리고 합심 협력하여 동양의 평화를 이루자고 강조했다. 그의 유언은 쓰지 못한 ‘동양평화론’의 마침표였다. 올해는 안중근 의사 순국 109주기이다. 그러나 한·중·일이 함께 평화와 번영의 길로 가자는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은 여전히 요원한 꿈이다. 안 의사 순국일인 26일 일본은 독도가 자기 땅이라는 내용을 담은 초등교과서를 공개했다.


<조운찬 논설위원>

Posted by mx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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