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칼럼

[여적]6·10만세운동

경향신문 2020. 12. 9. 09:28

6·10 만세운동/경향신문 자료사진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의 인산(因山·황제의 장례)일인 1926년 6월10일 오전 8시30분. 장례 행렬이 지나던 종로3가 단성사 앞에서 중앙고보 학생 300여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격문 1000여장을 뿌린 게 시작이었다. 이후 관수교·을지로·동대문·동묘 등 서울 시내 8곳에서 격렬한 만세 시위가 이어졌고 금세 전국으로 번졌다. 고창·원산·개성·홍성·평양·강경·대구·공주 등지에서 항일 시위가 일어났다. 1919년 3·1운동에 이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한 전국적인 독립운동인 ‘6·10만세운동’이다. 이 운동은 학생들이 독립운동의 주체로 나선 1929년 11·3광주학생운동의 원동력이 됐다.

 

6·10만세운동은 3·1운동 이후 일제의 무단통치 폭압 탓에 스러져가던 독립운동의 불씨를 다시 지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군대 총동원령까지 내려 삼엄한 경계에 나선 일제의 탄압에 맞서 무자비한 고초를 겪으면서도 승리를 거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이 운동은 민족주의·사회주의 진영과 학생·청년·종교계 등이 좌우 이념과 정파를 초월해 독립이라는 공동목표를 위해 연대에 나선 것이라는 면에서도 의미가 깊다.

 

그간 6·10만세운동이 3·1운동이나 광주학생운동에 비해 주목이 덜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다. 먼저 일제의 왜곡이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다수의 시위 가담자를 엄벌하면 식민통치의 부당성이 만천하에 드러날 것을 우려한 나머지 전국에서 1000여명을 체포하고도 11명만 재판에 회부하며 사건을 축소했다. 민족저항 운동이 아니라 소수 학생의 소요 정도로 치부한 것이다. 또 해방정국에서 좌익과 우익이 6·10만세운동에 참여한 조선공산당의 역할을 달리 해석하는 등 이념적 논란이 빚어진 점도 한 요인이다. 6·10만세운동은 공산당이 한 일이라는 오해까지 나왔다.

 

정부가 8일 6·10만세운동이 일어난 6월10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 일제의 의도적인 폄하와 후손들의 무관심으로 잊혀지던 그날이 제자리를 찾은 셈이다. 오로지 독립이라는 대의를 위해 정치 이념을 넘어서 하나로 뭉친 6·10만세운동의 정신을 계승하는 의미가 대립·반목으로 얼룩진 요즘 시국에 더욱 무겁게 다가온다.

 

차준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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