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신라의 수도 이전 시도

경향신문 2020. 8. 6. 14:00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삼국통일 후 즉위한 신라 신문왕(재위 681~692)은 689년에 수도를 경주에서 달구벌, 즉 지금의 대구로 옮기려 했다. 이 시도는 실패했다. 신문왕이 수도를 옮기려 했던 이유는 지금 봐도 이해할 수 있다. 백제와 고구려 영역을 아우르게 된 신라의 수도로 경주는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지금처럼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시대가 아니었다. 수도로 기능하려면 위치가 대구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나 생각했을 것이다.

 

신문왕의 수도 이전 실패는 한편으로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다. 당시는 신라의 왕권이 최고조인 통일 전쟁 직후였다. 어느 나라나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최고 권력자의 권력이 더 강화되기 마련이다. 신라가 초강대국 당나라까지 한반도에서 몰아낸 것이 신문왕 즉위 불과 5년 전인 676년이다. 신문왕은 지방행정구역을 크게 9주(州)로 나누고 5소경(小京)제도를 완비했다. 소경은 지방 거점도시다. 또 왕은 그때까지 귀족관료들에게 특권으로 묵인해 왔던 녹읍(祿邑)을 폐지했다. 녹읍이란 말 그대로 녹봉으로 준 고을(邑)이다. 그 고을 안의 자원과 사람을 모두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이 녹읍이다. 녹읍을 폐지할 수 있는 힘을 가졌던 신문왕이 수도 이전엔 실패한 것이다.

 

신라의 수도 이전 실패는 신라 진골 귀족들의 경주에 대한 집착을 보여준다. 그들에게는 경주 이외에 어떤 곳도 신라의 수도일 수 없었다. 신라 역사를 되돌아보면 그런 집착을 이해할 수는 있다. 신라 최초의 형태는 경주에 있었던 사로6촌이다. 촌락사회 단계의 신라가 바로 사로6촌이다. 그다음 단계가 사로국(斯盧國)이다. 사로국은 경주와 대구 일대에 위치한 진한(辰韓) 12개 소국(小國) 중 하나였다. 사로국이 나머지 소국들을 통합해 신라가 되었다. 이렇게 영역이 계속해서 확대되는 중에도 경주는 늘 중심이었다.

 

신라의 5악(岳)은 신라 지배층인 진골 귀족들의 심리적 지도를 잘 보여준다. 5악은 신라의 국가 제사가 행해진 곳이다. 흥미롭게도 신라의 5악은 서악(西岳, 공주 계룡산) 하나를 제외하면 모두 소백산맥 일대와 그 동남쪽에 있다. 하지만 삼국통일로 신라의 북쪽 국경선은 멀리 대동강 이남까지 확대됐다. 신라의 북방을 수호하는 진산(鎭山)으로서의 북악(北岳)은 적어도 서울의 남한산쯤은 돼야 어울린다. 그런데 실제로 신라의 북악은 태백산(경북 영주·봉화)이었다. 이는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 단계에나 어울렸다. 신라가 멀리 한강 넘어 송악에 자리 잡은 고려의 성장에 주의를 못 기울이다가 결국 패망하게 된 게 우연은 아니다.

 

신라는 삼국통일 과정에서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집권층의 단결력이 뛰어났다. 학자들은 그 이유 중 하나는 수도 이전과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고구려는 최초의 수도인 국내성 출신 구지배층과 평양 천도 이후 형성된 신지배층 간에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신라 지배층의 동질성은 삼국통일 후에는 반대로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사회적 다양성에 대처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었던 것이다. 한 국가의 정치·경제적 기득권은 국가의 수도와 단단히 결합되는 경우가 많다. 역사에선 기득권만 너무 강하면 쇠퇴하는 경우가 많았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8060300005&code=99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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