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역사와 현실] 흉년에 소금을 굽다

경향신문 2020. 10. 8. 10:33

며칠 전 아내와 동네 마트에 갔다가 배추값을 확인하고는 기겁을 했다. 손바닥을 모아 편 것보다 조금 더 큰 배추 가격이 6600원이었다. 과일값도 높아서 작아 보이는 포도 한 송이가 4000원이었다. 올여름 내내 여러 번 태풍이 지났고 비가 많았기에 빚어진 일이다. 채소와 과일값이 평년보다 훨씬 높아 소비자와 생산자 모두에게 부담스럽지만, 이 때문에 전국적으로 민심이 흉흉해지거나 나라가 위태로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어차피 먹거리 대부분을 이전부터 수입했으니 말이다. 우리나라 식량자급률은 20% 남짓에 불과하다.

 

조선시대에 올해 같은 일이 벌어지면 정말로 큰일이다. 조선은 부족한 생필품의 수입을 생각하기 어려운 폐쇄경제 국가였다. 어쨌든 나라 안에서 생산된 것으로 먹고살아야 했다. 올해 같은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될까? 모두가 조금씩 덜 먹으면 될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옛날은 물론 지금도 사회는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위험과 고통의 사회적 분담은 실제로는 언제 어디서나 대단히 어렵다. 어떤 사람들은 전처럼 하루 세끼를 먹을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굶주리다 죽게 될 것이다.

 

1737년(영조 13) 경상도 울산 부사였던 권상일(權相一)은 그해 상황을 일기에 적었다. 그 내용이 이렇다. “8월1일 정사(丁巳). 맑음. 가뭄이 갈수록 심해져 물을 댄 곳 외에는 논곡식이 모두 말라버려 남은 것이 없다. 밭곡식도 가망이 없으니, 걱정스럽고 답답한 심정을 견디기 어렵다. 감영에서 내려온 지시에는 ‘진휼할 방도를 십분 노력하여 고려할 것’이라고 하였으나, 우리 지역에는 남아 있는 곡식이 없다. 지역 내 빈산의 땔나무를 기르는 곳에서 나무를 베어다 소금을 구울 계획이다.”

 

위 내용에 따르면 논농사와 밭농사 모두 거의 망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감영, 지금으로 말하면 도청에서 백성들을 진휼할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가 내려왔지만 진휼할 곡식도 남아 있지 않았다. 권상일은 산에서 나무를 베어 바닷물을 끓여서 소금을 만들 궁리를 했다. 이렇게 만든 소금으로 곡물을 구하여 진휼에 쓸 생각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가뭄으로 흉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고, 홍수가 나면 기청제를 지냈다. 하지만 그것만 한 것이 아니다. 양반들이 술 빚는 것을 금지시켰다. 이를 어기는 양반들이 많았지만 임금은 맹물을 놓고 제사를 지냈다. 민심이 흉흉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극악한 죄가 아니면 죄수를 풀어주었고, 어떻게든 중앙과 지방정부가 무료급식을 실시했다. 무료급식용 죽은 수저를 세워서 쓰러지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다. 조선시대라고 기우제나 기청제가 효과를 내리라 생각한 것은 아니다. 평균적인 인간의 생각은 시대가 달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중요한 것은 위기 상황을 국가권력이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기회로 삼고, 문제 해결을 위해 애를 썼다는 것이다. 상황 자체보다 그에 대한 태도와 대응이 더 중요했다. 조선이 그 불안정한 농업경제를 기반으로 해서도 비슷한 전근대 어느 나라들보다 단위면적당 높은 인구를 부양하며 오래 지속되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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