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역사적 교훈을 실천한다는 것

고려 태조 왕건이 남긴 훈요십조는 보통 평양을 중시하라는 5조나 차현 이남 공주강 밖 사람들을 등용하지 말라는 8조 정도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십조’라는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총 조항은 10조나 되는데, 그중 하나가 다음의 제7조다.

“옛 사람이 ‘좋은 미끼를 쓰면 반드시 큰 고기가 물고, 상을 잘 주는 곳에는 반드시 훌륭한 장수가 있으며, 활을 겨누면 반드시 피하는 새가 있고, 어진 정치를 펼치면 반드시 착한 백성이 있다’고 하였다. 상과 벌이 적절하면 음양이 순조로워진다.”

정치를 잘하면 백성이 순하게 말을 잘 들을 것이며, 상벌이 적절하면 만사가 잘될 것이라는 얘기니, 너무 상식적이어서 평범하다. 이래서 이 조항이 큰 관심을 못 받아온 것이다. 그나마 ‘음양이 순조롭다’는 표현이 요즘 시대엔 낯설 터인데, 이는 기후가 예측 가능하여 순조로운 상태가 된다는 의미다. 이 부분은 자연과 인간의 정치가 직접적으로 호응한다고 생각하던 시대의 사고이다.

태조 왕건은 우리 역사상 어느 건국자보다도 고생을 많이 하며 나라를 열었다. 나라를 세운 것은 918년이지만 신라 통합이 완료된 것이 936년이니, 최종적인 패자가 되기까지도 18년이나 걸렸다. 거기에 죽는 그 순간까지도 왕위를 위협할 만큼 여전히 강성한 여러 세력들을 걱정했다. 그런 상황에 그가 엄선한 유언 중에 이렇게 평범하기만 한 말이 들어가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만큼 이 쉬운 이야기가 보편적 진리라는 말이 될 것이다.

건국자 태조가 남긴 말을 후대의 왕들은 어떻게 지켜야 했을까? 이 말의 본뜻에 충실하면 된다. 내가 행하는 상벌이 적절한가, 인사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나를 고민하고 반성하면 될 뿐이다. 그러나 이는 너무 밋밋해서 뭘 하고 있는 티가 안 난다. 그래서 후대 왕 중에는 유언의 본질보다는 ‘내가 우리 시조를 따라서 이렇게 정치를 열심히 하고 있어!’라고 하는 티를 내는 방법만 고민한 사람이 나오곤 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고려 의종이다. 의종은 글도 잘 짓고 무예도 잘했다는 평이 있을 정도로 재주가 많았으나, 부모는 모두 그가 임금감이 아니라며 근심했다. 재주는 있으나 허영심이 많아서 잘한다고 치켜세워주고 아첨해주는 사람이 필요한 타입이었기 때문이다. 왕이 되고 나서도 그는 정치의 진짜 본질을 고민하기보다는 잘하는 티가 나는 일에 몰두했다. 시조를 따르겠다며 가는 데마다 궁궐을 짓고 다니더니, 재위 22년이 되던 해에는 평양 관풍전에 행차하여 야심 찬 교서를 반포했다. 자신이 태조의 말을 따라 옛 정치를 혁신하고 부흥시키겠다는 내용이었는데, 그 첫 조항이 이것이었다. “근래 내린 명령이 음양에 맞지 않아 추위와 더위가 일정하지 않자 백성들이 편안하지 못하였다. 이제부터 포상은 봄과 여름에 하고, 형벌은 가을과 겨울에 시행하며 모든 행하는 일은 월령을 따르도록 한다.”

상벌을 계절에 맞춰 시행하기만 하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 생각했다니! 태조처럼 음양의 순조로움을 말한다고 같은 얘기가 되는 게 아니다. 도리어 200년 전 태조 왕건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퇴행적인 조처였다.

호기롭게 새로운 영을 선포하였으나 정치가 혁신되기는커녕 2년 후, 무신정변으로 의종은 왕위에서 쫓겨났다. 그 3년 후 의종은 경주 곤원사에서 등뼈가 꺾여 죽었고, 시체는 가마솥 2개와 함께 묶여 연못에 버려졌다. 사서에서는 왕이 자기하고 싶은 대로만 하다가 변란에 이르렀다며, “그러므로 임금은 좋아하는 것을 삼가지 않을 수 없다”고 평하였다. 변란을 일으킨 사람, 왕을 죽인 사람, 모두 한때 그가 총애했던 사람들이었다. 곤원사의 승려는 연못에 들어가 가마솥 두 개만 챙겨나왔고, 왕의 시신은 그대로 버려졌다. 교훈을 잘못 이해한 자의 쓸쓸한 말로였다.


장지연 대전대 H-LAC대학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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