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왕조의 자연 수명

경향신문 2022. 1. 27. 10:51
 

이븐 할둔(1332~1406)은 북아프리카 중부의 튀니스에서 출생해 이집트 카이로에서 사망한 역사가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고려 말에 태어나 조선 건국 후에 사망한 이색과 이성계 시대에 살았던 인물이다. 사하라 이북 북아프리카는 이슬람 전통이 뿌리 깊은 곳이다. 이븐 할둔은 자기 생애에 이미 이 지역에 있었던 여러 왕조에서 그 학문적 명성이 높았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이 “(서양에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쓴) 투키디데스가 역사학을 창시했다면, 이븐 할둔은 역사학을 하나의 학문으로 정립한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이븐 할둔은 그의 책 <무카디마(Muqaddimah)>(‘성찰의 책’이라는 뜻이고 한국에서는 <역사서설>이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에서 흥미로운 주장을 한다. “왕조들도 개인들처럼 자연 수명이 있다”는 것이다. 태어나 죽지 않은 사람이 없고, 패망하거나 소멸하지 않은 왕조가 없으니 인정할 수밖에 없는 말이다. 그가 주장한 왕조들의 자연 수명은 3대 120년이다. 한 세대를 40년으로 보았다. 아마도 그가 살았던 북아프리카 지역 왕조들의 지속 기간이 그 정도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븐 할둔의 주장에서 요체는 왕조의 지속 기간이 아니고, 개별 왕조들이 자연적으로 제한된 수명을 갖는 이유이다. 그가 말한 왕조를 구성하는 각 세대의 내용은 이렇다. 왕조를 세운 1세대 집단은 억척스럽고 야만스럽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 보면 적극적이고 용맹하며 소박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들은 척박한 환경에서 고통과 영광을 옆 사람들과 나누며 서로 강력한 ‘연대의식’을 가진다. 바로 이런 집단적 특성과 공통의 경험이 신왕조 건설의 힘이다. 2세대는 점차 도시문화에 젖어든다. 1세대가 경험했던 곤궁함은 사치와 풍요로 전환되고, 모든 사람들이 영광을 공유했던 상태에서 이제 한 사람만 혹은 그를 둘러싼 극소수만 영광을 독차지한다. 그 결과 연대의식은 상당 부분 파괴된다. 하지만 2세대는 아버지 세대의 모습을 자신들이 직접 보았기에 건국의 기풍을 기억한다. 3세대는 건국의 경험도 없고, 그것을 본 적도 없다. 이제 그들은 번영과 안일한 생활에 대한 탐닉 속에 사치가 절정에 이른다. 3세대 사이에 연대의식은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이븐 할둔이 왕조의 자연 수명을 120년이라 말한 것은 우리의 역사 경험과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가 말한 왕조 구성원의 변화 양상은 탁월한 통찰이다. 우리나라 역사를 포함하여 많은 왕조국가들의 역사는 이 패턴의 다양한 변주처럼 보인다. 사실 오늘날도 공동체 구성원의 변화에 대해 그가 말한 근본적인 패턴은 달라졌다고 보기 어렵다.

프랑스 역사가 조르주 뒤비는 세계적 차원의 ‘근대 사회’가 본격적으로 작동한 것은 1차 세계대전 이후로 본다. 이 시기 이전의 근대란 공동체에서 불과 10% 정도를 차지한 도시들에서 일어난 일이라 말한다. 근대는 겨우 100년의 경험을 축적한 셈이다. 자본주의 근대가 지속되면서 우리는 선명하다고 생각했던 근대와 전근대의 구획선이 점점 더 희미해지는 현상을 자주 목격한다. 자타가 인정하는 선진국들에서 나타나는 민주주의의 위기, 부의 양극화와 뚜렷해지는 사회 계급화 현상 등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곰곰이 따져보면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내용이나 규칙들은 전근대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선거를 민주주의의 축제라 하지만, 현실감 있게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일종의 정기적이고 제한적으로 치러지는 내전에 가깝게 느껴진다. 한국은 건국된 지 이제 70년 남짓된 국가이고 그 구성원들은 상이한 세대적 경험과 개인적인 욕망을 내재하고 있다. 어느 쪽이 되었든지 사적 욕망을 잠재울 수 있는 더 강력한 공적 연대의식을 확보하는 쪽이 ‘내전’에서 승리했으면 좋겠다.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역사와 현실]최신 글 더 보기

'역사와 현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풍 김밥과 사실, 그 너머 진실  (0) 2022.02.10
세는나이를 내버려두라  (0) 2022.02.03
왕조의 자연 수명  (0) 2022.01.27
점입가경, 일본의 혐한  (0) 2022.01.20
마늘이 알려준 이야기의 힘  (0) 2022.01.13
분서와 훼판  (0) 2022.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