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우리에게 “남조선”은 무엇입니까

경향신문 2020. 6. 25. 14:29

살기가 어려워도 희망 없이는 살 수가 없다. 어려움이 클수록 고통을 벗어난 이상세계를 향한 동경도 커지는데 이것이 인간 역사의 모습이다. 조선 후기에도 그러했다.

 

그때 많은 사람이 어지러운 사회경제적 현실에 괴로워했다.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과감한 개혁이 필요한 때였다. 그러나 조정 대신들은 그들 자신이 속한 기득권층의 이익에 봉사할 뿐이었다. 그들은 백성의 편에 설 생각이 없었으므로 조정의 실정에 분노하는 사람들의 수가 자꾸만 늘어났다. 그들 중에는 하루빨리 조선왕조가 망하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다가올 새 세상에 희망을 걸었다. 그들은 <정감록>이라는 정치적 예언서를 삶의 교과서로 삼았다. 이 책은 누가 저술했는지도 알 수 없으나, 영조 때 역사의 표면으로 떠오른 것만은 사실이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엄금했으나, <정감록>의 인기는 갈수록 높아졌다.

 

곧 세상을 구원할 진인이 나타나 모두를 새 세상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주는 책이었다. 그때가 되면 현세의 고통은 봄눈 녹듯 사라지고, 사람들이 가슴 깊이 간직해온 바람이 하나씩 이뤄진다는 예언, 그 약속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9세기를 지나는 동안 세상에는 흉한 일이 더 많이 일어났고, 그럴수록 <정감록>은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었다.

 

20세기의 역사가 육당 최남선은  <정감록>이 전파한 이상세계를 ‘남조선(南朝鮮)’이라 불렀다. ‘남조선이란 무엇입니까’라는 글에서 그는 흥미로운 설명을 붙였다(최남선, <조선의 상식>, 1946). 우리말에서는 남쪽을 ‘앏(앞)’이라고 하므로, 앞으로 전개될 조선, 즉 미래의 한국이 남조선이라는 말이다.

 

최남선은 ‘3·1 독립선언서’ 필자이자 민족주의 역사가였다. 그런데  일제에 협력한 오점으로 친일 시비에도 휘말린 비운의 주인공이다. 그가 수백년간 한국인의 가슴 깊이 파고든 이상세계의 본질을 탐구했다는 사실이 내겐 무척 흥미롭다.

 

알고 보면 18세기에도 보통 사람들의 마음으로 이상세계를 그린 지식인이 있었다. 당대 제일의 문장가 연암 박지원이었다. <허생전>이란 작품에서 그는 주인공 허생을 통해 이상세계 모습을 구체화했다. 허생은 사회적 불만이 사라진 세상을, 누구도 가난에 시달리지 않는 풍요로운 사회를 선보였다. 박지원은 누구보다 박식했고 당대의 현실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니, <정감록>의 유행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므로 <허생전>은 이상세계를 동경하던 동시대인들에게 주는 작가의 특별한 선물이었다 생각한다.

 

박지원의 지적 전통을 계승하면서, 최남선은 한국인의 이상세계에는 3가지 특징이 있다고 진단했다. 첫째, 어느 한 사람이 꿈꾸는 이상세계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저절로 각인된 바람직한 사회상이라는 점이다. 옳은 말이다. <허생전> 역시 박지원 한 사람의 창작이라기보다는 세상 사람들이 오랫동안 주고받은 담론의 결과물이라고 봐야 한다.

 

둘째, 한국 사람들은 이상세계조차 고착된 불변의 모습이 아니라 가변적인 모습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우리가 바라는 이상세계는 시대적 변화에 발맞추어 깊이도 더하고 폭도 더 넓어질 수 있는 유연성이 있다고 했다. 지난 반세기의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보아도 우리는 늘 새로운 지향점을 선택했다. 현대사의 역동성을 고려할 때 최남선의 주장은 옳은 것 같다.

 

끝으로, 한국인의 이상세계는 유난히 현실적이고 실천적이라고 최남선은 말했다. 그의 판단처럼 식민지 시대에는 민족 해방이 이상이었고, 해방 뒤에는 사회적 혁신이 우리의 이상이었다. 시대변화에 부응하면서도 우리의 가치관과 양심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이 시끄럽고 불안하기만 한 요즘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지구 곳곳에서 일자리가 많이 사라졌고, 앞으로 세계경기가 어떻게 될지 오리무중이다. 먹고사는 일도 어려운 판에 한반도를 둘러싼 공기는 더욱 무겁기만 하다. 별일 없을 줄로 믿었던 남북관계까지도 삐걱댄다. 일본과의 긴장도 풀릴 조짐이 없는 데다 중국과 미국의 갈등 속에서 한국이 설 자리는 어딜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더 큰 희망을 이야기해야겠다. 당신과 나의 이상세계는 어떤 모습으로 언제 와야 할까.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chonmyongd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