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율곡 이이에 비친 개혁의 궤적

경향신문 2022. 2. 24. 10:46

선조 2, 3년 무렵 이이는 조정에 모인 패기만만한 수재형 관리들 중에서도 단연 빛나는 존재였다. 그의 나이 34, 35세 무렵이다. 선조 즉위(1567) 무렵 사림의 주요 세력인 양심적 지식인과 젊은 관리들은 50년이나 계속된 정치적 암흑이 걷히고 개혁이 시작됐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조정의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는 중종·명종 대 구시대 기성 정치인들인 구신(舊臣)들을 깊이 혐오했다. 이이는 신진 엘리트 관리들을 대표해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대신들은 구체제에서 여러 번 원칙과 태도를 바꿔가며 겨우 제 몸이나 보전한 사람들입니다. 벼슬이 높았던 자일수록 행동이 비열했고, 요직에 있던 자일수록 그 인간적 재질은 하등에 속합니다.”

선조 3년 조정의 큰 이슈 중 하나가 을사사화(1545) 공신 취소 문제였다. 을사사화는 명종 즉위년에 사림파를 포함해 반대파가 대규모로 숙청된 사건이다. 을사사화 공신을 취소한다는 것은 명종 대 정치 자체를 부정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명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공신은 많은 땅과 노비를 나라에서 받았다. 공신 당사자 및 구신들에게 이 상황은 죽고 사는 전쟁과 다름없었다. 이 논의를 이이, 이산해, 윤근수, 송응개, 류성룡 등이 모인 홍문관이 주도했다. 홍문관에서 모두 41번이나 상소문을 작성했는데, 이이 혼자 모두 썼다. 이이는 홍문관 엘리트들의 총수였다.

선조 5년 조정에서 큰 이슈로 제기된 것이 향약이다. 향약은 고을별 자치규약이다. 좋은 일은 서로 권하고, 잘못은 서로 바로잡아주며,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돕자는 내용이다. 사림들은 향약 실시에 적극 찬성했다. 이유는 분명했다. 좋은 취지의 향약도 규율이 되면 결국 권력으로 작용한다. 규율은 그 위반 여부를 판단하고 처벌하는 주체가 있기 마련이기에 권력과 짝한다. 사림이 향약 실시를 요구한 것은 자신들이 그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정에서 거의 유일하게 이이가 향약 실시에 반대했다. “굶주림과 추위에 허덕이는 백성에게 억지로 예를 행하게 할 수 있겠나”라고 반문했다. 그는 다스리는 자의 권력보다는 책임을 우선했다. 사실은 그것이 본래 공자가 말했던 것이다. 이이는 이 시기 이후 동료 및 후배들과 점차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이는 5년간 낙향해 있다가 선조 13년 말 조정에 복귀했다. 한때 동료였던 동인과 서인의 갈등을 가라앉히고 멈춰 있는 민생 개혁을 이루려는 목적이었다. 이후 3년간 그는 이 목표를 이루려 혼신의 노력을 했지만 결과는 완전한 실패였다. 그 끝에서 자신도 갑자기 병사했다. 이이의 노력에 대해 홍문관 동료 송응개는 대단한 적의(敵意)를 담아서 말했다. “이이가 동서를 화합시킨다 주장했지만 그의 주장에 담긴 뜻은 공(公)을 내세워 사(私)를 이루려는 계략에 불과하다.” 나아가 그는 이이가 본래부터 사림도 아니고 ‘소인’이라고 말했다. ‘소인’이란 정치적으로 제거해야 할 대상을 말했다. 사림이 구신을 가리켰던 말이다. 이이는 동료와 후배들에게 ‘소인’으로 규정된 채 사망했다. 하지만 임진왜란의 참화 후 이이의 주장은 계승되어 조선 정치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다.

조정에서 동인과 서인이 갈라선 것은 선조 8년이다. 사림 그룹 내에서 서인이 선배였고 동인이 약간 후배였다. 갈등이 처음부터 극심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동인과 서인 사이의 갈등을 극적으로 높인 촉매가 있었다. 구신들이었다. 서인에게 배척되었던 그들은 동인과 결합했다. 적의 적은 동지였다. 이이에게 철저히 배척되었던 구신들은 10년 만에 조정에 돌아와 동인들의 손을 빌려 서인을 거의 궤멸시켰다. 50년간 이어졌던 구신 권력이 그리 쉽게 물러날 세력이 아니었다. 가장 개혁적이라 자부했던 동인들은 자신들이 적으로 규정한 서인을 몰아내기 위해 구신들과 손을 잡았다. 그러고서 두 세력은 이이를 소인으로 규정했던 것이다. 개혁은 본래 엎치락뒤치락 진행되는 모양이다.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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