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칼럼

[이광표의 근대를 건너는 법]흥미로운 풍경을 담은 맥주들

경향신문 2021. 11. 5. 09:38

최근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열린 52년생 곰표 관련 전시회.

얼마 전 유튜브를 뒤적이다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 쇼>를 다시 들었다. 1980년대를 풍미했던 라디오의 심야 음악프로그램. 다시 들은 건 1981년 9월 어느 날 방송분이었다. 시그널 뮤직에 앞서 광고방송부터 흘러나왔다. “새 시대를 앞서 가는 여러분의 문화방송입니다. 오리엔트 아날로그. 수정 손목시계 오리엔트 아날로그. 오리엔트시계 제공 시보 11시를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러곤 귀에 익은 시그널 뮤직, 이종환 특유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모두 반가웠지만 시계광고가 특별히 오랫동안 머리에 남았다. 40년 전엔 아날로그라는 용어를 저리 당당하게 광고할 수 있었구나.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오리엔트 아날로그 시계는 지금도 생산되고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밀려왔다.

 

내친김에 유튜브에서 옛날 광고를 몇 개 찾아보았다. 그러다 롯데껌 광고를 만났다. 트윈폴리오 출신 윤형주의 CM송으로 더욱 유명한 그 광고. “멕시코 치클처럼 부드럽게 말해요. 롯데껌처럼 향기롭게 웃어요. 쥬시후레쉬, 후레쉬민트, 스피아민트. 오 롯데껌. 좋은 사람 만나면 나눠주고 싶어요….” 1972년 출시되어 오랫동안 껌의 대명사로 통했던 롯데껌 삼총사. 그 껌맛처럼 CM송은 지금 들어도 상쾌했고 영상은 풋풋했다. 그러자, 요즘 나온 쥬시후레쉬 맥주와 스피아민트 맥주가 떠올랐다.

 

요즘 편의점에 가면 특이한 이름의 맥주가 인기다. 곰표 맥주, 말표 맥주, 금성 맥주, 백양 맥주, 유동골뱅이 맥주…. 맥주 제조업체와 유통업체가 타 업종의 브랜드와 손잡고 만들어 낸 컬래버레이션 맥주다. 그 선두주자는 2020년 출시된 곰표 맥주다. 곰표는 대한제분의 밀가루 브랜드. 사실, 곰표의 컬래버는 대한제분이라는 오래된 브랜드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한 홍보마케팅의 일환이었다. 그런데 시장의 반응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곰표는 맥주를 넘어 패딩, 셔츠, 화장품, 세제, 과자, 막걸리, 식혜 등 전방위로 확산되었다.

 

곰표 맥주가 선전하자 유사한 맥주가 줄을 이었다. 말표 흑맥주, 백양 비엔나 라거, 금성 맥주, 유동골뱅이 맥주…. 말표 맥주는 말표 구두약의 브랜드를, 백양 맥주는 BYC 속옷 브랜드를, 금성 맥주는 LG의 전신인 금성의 브랜드를 가져왔다. 급기야 껌 브랜드의 맥주까지 등장했다. 모두 1960년대 전후 태어나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해온 브랜드들이다. 그런 컬래버 맥주를 사람들은 왜 즐기는 걸까. 누군가는 “맛이 좋아서”라고, 누군가는 “특이하고 재밌잖아”라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설명이 좀 부족하다. 다른 배경이 숨어 있는 건 아닐까.

 

곰표 밀가루는 전쟁의 와중인 1952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혼란스럽고 가난하던 시절이었다. 광목 밀가루 포대에 우직한 곰 한 마리 그려져 있고, 그 밀가루와 함께 우리는 가난을 이겨냈다. 곰과 함께 우직하게 여기까지 왔다. 그렇기에 곰표 밀가루는 힘겨웠던 시대의 상징이었고 동시에 가난 극복과 산업화의 상징이었다. 바로 이것이다. 곰표는 그 시절의 애환과 추억을 불러냈고 나아가 소비자의 감성을 절묘하게 건드렸다. 그게 컬래버 맥주 인기로 이어진 것이다. 말표, 백양, 금성, 유동골뱅이, 쥬시후레시 맥주 모두 비슷한 상황이 아닐까.

 

그런데 서로 비슷한 듯하면서 좀 다른 면도 보인다. 1952년생 곰표 밀가루엔 무언가 삶의 지난함 같은 것이 담겨 있는 듯하고 1972년생 쥬시후레쉬 껌엔 무언가 싱그러운 낭만 같은 것이 담겨 있는 듯하다. 20년의 나이차 때문일까. 그렇다면, 곰표 맥주와 쥬시후레쉬 맥주 맛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어쨌든 그런 차이까지도 우리가 지나온 수십 년 전 근대의 소중한 흔적인 셈이다. 지금 우리는 맥주라는 일상을 통해 근대의 흔적을 만난다. 맥주를 마시며 근대를 기억하고 소비하고 있다. 2021년 우리의 흥미로운 ‘근대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이광표 서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