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이순신의 공적

경향신문 2019. 8. 22. 11:02

이 나라에는 일제강점기를 몸으로 직접 겪은 분들이 아직 살아계시다. 그분들의 뼈아픈 증언이 있음에도, 일각에서는 엉뚱한 주장을 한다. 그들은 강제징용 자체를 부정한다. 심지어는 ‘위안부’ 역시 당사자가 자의로 선택한 경제적 활동이었다고 주장한다. 당사자들의 고통을 외면한 채 어찌 이런 망발을 할 수가 있는가. 


‘임진년의 일을 따져본다(論壬辰事)’는 글을 읽다가 나는 무릎을 쳤다. 세상에는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잘못 읽는 일이 과연 허다했다. 내가 읽은 글의 저자는 무명자 윤기였다. 실학자 성호 이익의 제자로, 세상의 잘잘못을 날카롭게 따진 글을 많이 남긴 선비였다. 여기서 소개하려는 글은, 무명자가 70의 나이를 바라보던 1809년경의 저술이었다.


윤기가 살아 있을 때에도 조선의 많은 지식인들은 임진왜란의 승패에 대해 쓸데없는 논쟁을 벌였다. 윤기는 그런 현실에 분개했다. 그는 역사적 인식의 문제를 깊이 따져보았다.


알다시피 조선의 선비들 가운데는 무턱대고 중국의 은혜를 강조하는 경향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조선이 임진왜란을 무사히 극복할 수 있었던 것도 명나라 덕분이라고 굳게 확신했다. 홍만종 같은 이는 자신의 저서 <동국총목>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왜적을 격파하고 우리나라의 수도를 수복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그 난리에 명나라 황제께서 양호, 마귀, 형개 등의 장수를 보내 왜적을 토벌하셨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결국 물러나고 만 것은 명나라의 도움이 있어서였다.


그러나 이와 다른 주장도 있었다.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임진왜란 때 전세가 뒤바뀐 것은 무엇보다도 이순신 덕분이었다고 확신했다. 윤기는 이중환의 주장이 옳다고 여겼다. 그래서 이중환의 견해를 꽤나 자세히 소개했다. 그중에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설득력이 큰 내용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임진년에 일본 승려 현소는 평양까지 올라와 선조에게 협박편지를 보냈다. 그때 선조는 의주에 피란 중이었다. 현소는 문제의 편지에서 일본군은 곧 수군 10만명을 서해 방면으로 보내 수륙 양면작전을 펼 거라며, 이제 선조는 어디로도 피할 수 없을 거라고 협박했다. 빨리 항복하여 목숨을 구하라는 말이었다.


실제로 일본 수군은 북상을 서둘렀다. 하지만 그 계획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이순신이 그들의 앞길을 차단했다. 일본 수군은 수륙 양면작전을 전혀 펴지 못한 채 전전긍긍할 뿐이었다.


이순신이 일본군의 수륙 양면작전을 완벽하게 무력화시킨 덕분에, 명나라 군대는 자신들이 계획한 대로 전투를 치를 수 있었다. 초기에 이여송이 일본군을 격파한 것은 물론 사실이지만, 그 이면에는 이순신의 활약이 있었다.


만약 이순신이 일본 수군의 서해 진출을 막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순식간에 일본 수군은 평양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군은 먼 길을 오느라 지친 명나라 군대를 곧바로 쳐, 조선의 운명은 점치기 어려웠을 것이다.


윤기는 임진왜란의 진실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보았다. 식자층이 왜란 때의 실정을 잘 알지 못한 채 엉뚱한 주장에 매달리는 현실이 실로 안타까웠다. 혹자는 그때 명나라가 일본 장수들에게 큰 작위를 주겠다는 둥, 조선 땅을 떼어주겠다는 둥 현란한 외교전술을 편 덕택에 나라가 무사했다고까지 주장했다. 역사를 멋대로 재단하는 것은 정말 한심한 일이다.


이쯤에서 고개를 돌려, 중국인들은 임진왜란이 무사히 끝난 것을 누구의 공적으로 돌렸을까를 알아보자. 윤기는 <명사(明史)>의 내용을 신중히 검토했다. 중국에서는 자기네 수군제독 진린의 공을 으뜸으로 여긴 사실이 포착되었다. 명나라 황제는 진린에게 큰 상을 내리고 작위까지 주었다. 


윤기는 여러 가지 문헌을 토대로 과연 진린에게 그만 한 공적이 있었는지를 따져보았다. 아울러, 중국의 다른 장수들은 활약상이 어땠는지도 조사해보았다.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명나라 장수 양호는 상당한 공을 세웠으나, 도리어 동료들의 모략에 걸려 처벌을 받았다. 명장으로 알려진 이여송도 한번 여석령에서 일본군에게 패하자 더 이상 싸우려 하지 않았다. 또 이종성은 일본군에 패전한 끝에 자살했다. 양호 역시 적에게 밀리자 멀리 도망쳤다. 온 세상이 명나라 군대의 은혜를 들먹였지만 승패는 반반이었다.


진린의 경우도 알고 보면 문제투성이였다. 그는 전투 중에 배를 버리고 도주한 적이 있었다. 심지어 이순신이 적을 격파했을 때도 그는 역정을 냈다. 그의 마음이 좁은 것을 눈치 챈 이순신은 우리 수군이 벤 일본군의 머리를 몽땅 그에게 던져주었다. 그러자 진린은 화를 풀었다. 그럼에도 명나라 조정은 진린에게 큰 상을 주었으니, 그들의 평가란 신뢰하기 어렵다.


많은 기록을 검토한 끝에, 윤기가 내린 결론은 간단하고 명확했다. 나라가 위기에서 벗어난 것은 이순신 덕분이었다. “아, 충무공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모두 왜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21세기의 윤기가 있다면 일제강점기의 역사도 설왕설래할 일은 아닐 것이다.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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