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이이와 김육

경향신문 2020. 11. 5. 11:36

율곡 이이(1536~1584)와 잠곡 김육(1580~1658)은 조선시대에 국정운영의 원칙을 세우고 모범을 보여준 대표적 인물들이다. 자신들은 몰랐겠지만, 두 사람은 서로 이어져 있다. 이이는 조선 최대 세금제도 개혁인 대동법의 개념을 설계하고 그 필요성을 처음 주장했고, 김육은 그것을 입법해 현실에서 작동시켰다. 그런데 죽음을 앞둔 시점에 두 사람의 정치적 성과는 크게 달랐다. 이이는 실패했고, 김육은 성공했다. 근본적으로는 시대상황 차이 때문이지만, 각자의 정치적 견해도 어느 정도는 영향을 끼쳤다.

 

이이는 1580년 12월 조정에 복귀했다. 낙향한 지 5년 만이었다. 선조의 간곡한 요청이 있었고, 이이 자신도 조정의 정치적 파행을 더 이상 지켜만 볼 수 없었다. 이이는 두 가지 정치적 목표를 세웠다. ‘국정 개혁’과 ‘동서 보합’이었다. 둘 다 그가 낙향 전부터 주장했던 내용이다. ‘국정 개혁’의 핵심 내용은 후일 대동법으로 귀결되는 세금 개혁이다. 당시 국가 재정과 민생 모두에 빨간불이 들어와 있었다. ‘동서 보합’이란 동인과 서인을 아우르는 것이었다. ‘국정 개혁’이 국정 목표라면, ‘동서 보합’은 그것을 뒷받침하는 정치세력 문제였다. 서로 연결된 것이었다. 이이는 동서 보합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당시 조정을 지배하던 동인의 리더들은 이이가 본래 아끼고 발탁한 그의 후배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이는 인간됨이 소속 당파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믿음은 결과적으로 망상에 불과했다.

 

김육은 개인의 정치적 성향보다 정책 목표를 더 중시했다. 대동법 성립 당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일을 시작하자는 말은 비록 내가 처음 꺼냈지만, 여러분이 알맞게 변통하지 않았다면 중간에 막혀서 (대동법은) 시행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란 대동법 성립을 위해서 그가 뽑아서 배치한 인물들이다. 이시방(1594~1660), 김홍욱(1602∼1654), 허적(1610~1680) 같은 이들이다. 대동법 성립 과정을 보면 이 말은 상투적인 치사가 아니다. 오히려 김육이 말한 것 이상이다. 김육이 죽은 후에 이들이 이 법의 완성을 책임졌기 때문이다.

 

주목할 것은 김육이 이 사람들을 모을 때 당색, 나이, 자신과의 친분 등을 전혀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오직 세금 문제에 대한 전문성이 있는지, 개혁에 대한 개인적 열망을 가지고 있는지만 보았다. 김홍욱은 대동법 성립 전 그 방법론을 두고 김육과 공개적으로 견해를 달리했다. 하지만 김육은 충청도 대동법의 실시를 위해 그를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되도록 한다. 그가 충청도 서산 사람이고 그의 전문성과 개혁 열정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허적은 김육과 30년 나이 차이가 있고, 정치적으로 김육과는 다른 남인이었다. 하지만 김육은 그를 발탁했고, 그는 대동법 완성에 커다란 공을 세웠다.

 

이이는 동인과 서인의 화합을 추진했지만 그의 목표는 완전히 실패했다. 반면 김육은 당파 간 화합을 추진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당파성이 옅고 전문성과 개혁성이 강한 인물들을 개인적으로 뽑아 드림팀을 구성했다. 이 팀으로 개혁에 성공했다. 정치를 함에 성과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 사람은 다름 아닌 이이다.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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