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인간의 죽음에 대한 예의

경향신문 2020. 1. 30. 10:53

성이성(成以性, 1595~1664)은 <춘향전>에 등장하는 이몽룡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인물이다. 전라도 암행어사로 내려와 거지꼴로 원님들의 잔치 자리에 끼어들어 ‘술동이에 담긴 술은 백성의 피요, 쟁반에 올린 안주는 백성의 기름’이라는 시를 짓고는 ‘암행어사 출두’를 외쳤다는 일화가 <필원산어>에 실려 있다. <춘향전>의 클라이맥스와 똑같은 이 일화가 발견되자 한때 국문학계가 떠들썩했다.


성이성은 십대 초반에 남원부사로 부임한 부친을 따라와 남원에서 살았다. 이 점도 이몽룡과 비슷하다. 하지만 춘향 같은 여인과의 로맨스가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설령 있었다 해도 <춘향전>처럼 극적인 재회는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성이성이 과거에 급제하였을 때가 33세, 암행어사로 전라도에 내려왔을 때가 45세였다. 춘향이 할머니가 되고도 남는 세월이다. 암행어사 출두 이야기도 다른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다.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성이성은 여러 고을의 지방관을 역임하고 경상, 전라, 충청 3도의 어사를 지내면서 청렴하고 유능한 관원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이런 사실이 암행어사 출두 이야기로 각색된 듯하다. 성이성은 조선 조정이 공식 인정한 청백리였다. 그가 진주 목사로 재직 중이던 1659년, 경상도 어사로 파견된 민유중(閔維重)은 성이성에게 가장 높은 고과를 매겼다. “몸가짐이 청렴하고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여 지금도 민간에서 부녀자들이 칭송하며 잊지 못한다.” 민유중이 조정에 보고한 성이성의 치적이다.


민유중은 서인(西人)이고 성이성은 남인(南人)이다. 당파가 다르면 칭찬에 인색하기 마련인데, 이렇게 극찬한 걸 보면 성이성이 청렴한 관원이었다는 점은 믿어도 좋을 듯하다. 민유중도 대견하다. 그는 인현왕후의 부친으로 서인 정권의 핵심인사였지만, 백성의 여론에 귀를 기울여 공정한 평가를 내렸다.


성이성의 증손 성기인(成起寅, 1674~1737) 역시 청렴한 가풍을 계승하여 어진 지방관으로 이름났다. 만경 현령 시절에는 봉급의 절반을 떼어 유랑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훗날 비리로 모함을 받고 감옥에 갇히자 만경 백성 수백 명이 한양에 올라와 결백을 호소했다.


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 전국이 병화에 휩싸였다. 성기인은 난리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한양으로 달려가다가 길에 쓰러진 여자아이를 발견했다. 담요로 감싸고 미음을 먹이니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아이를 둘러업고 한양으로 데려왔다. 알고 보니 그 여자아이는 노론 명문가 우봉이씨 이구(李絿)의 딸이었다. 이구가 난리통에 가족을 데리고 피란하다가 딸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노론 명문가의 딸이 남인 덕택에 목숨을 건졌다. 


성기인이 구해준 이구의 딸은 나중에 민백겸(閔百兼)에게 시집갔다. 민백겸은 과거 성기인의 증조 성이성을 호평한 민유중의 증손이다. 서로 다른 당파에 속한 두 집안의 인연은 뜻하지 않게 다시 이어졌다. 1737년 성기인이 세상을 떠나자 이구의 딸은 위문하는 글을 보냈고, 대신 남편 민백겸이 성기인의 상주 본가까지 직접 찾아와 조문했다. 당파가 다르면 조문조차 가지 않는 법이지만, 아내를 구해준 은인이니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조선 당쟁사에서 보기 드문 인간적인 장면이다. 치열한 당쟁의 와중에서도 인간의 죽음에 예의를 표할 줄 알았다.


사람의 죽음은 화해의 계기가 되곤 한다. 화해가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싸움은 멈춰야 한다. 몇달 전 대통령이 모친상을 당했을 때 야당 대표들이 보여준 성의가 바로 그것이다. 조문객을 받지 않겠다는데도 굳이 찾아와 대통령의 손을 잡고 위로를 전했다. 서로 잡아먹을 듯이 싸우는 우리 정치판에도 인간미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계기였다. 


검찰의 대규모 물갈이 인사 전 “당신이 검사냐”라는 이른바 상갓집 항명이 있었다. 검찰 내부의 반발 기류를 전하려는 계산된 행동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장소를 잘못 골랐다. ‘관 옆에서 싸움한다’는 속담이 있다. 기본적인 예의도 모른다는 말이다. 검찰의 상갓집 추태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구성원의 경조사를 꼼꼼히 챙기는 검찰의 관습 때문이라 한다. 거기까진 좋은데, 평소 얼굴을 마주할 일이 드물다 보니 불화가 생기면 꼭 상갓집에서 터진다는 것이다. 치열한 다툼도 죽음 앞에서는 잠시 멈추는 법이다. 그것이 인간의 죽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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