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인정의 나라, 인륜의 나라

경향신문 2019. 10. 14. 14:34

성호 이익이 말했다. “우리나라는 인정의 나라다.” 마음씨 좋은 사람이 많다는 뜻일까? 아니다. ‘인정’은 뇌물의 다른 이름이다. 이름은 아름답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뇌물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성호가 본 조선은 뇌물의 나라였다.


인정이라는 명목의 뇌물이 가장 만연한 분야는 조세 행정이었다. 국가 재정을 지탱하는 전세(田稅), 군역(軍役), 공납(貢納)은 모두 뇌물의 온상이었다. 무슨 특별한 혜택을 바라서 뇌물을 주는 것이 아니다. 뇌물이 없으면 정상적인 세금 납부조차 불가능했다. 세금을 깎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금을 내기 위해 뇌물을 주어야 했던 것이다. 


전세는 지방 관청에서 수합해 조운선(漕運船)에 실어 한양으로 올려보낸다. 이 과정에서 온갖 명목으로 추가 비용을 징수했다. 아직 발생하지도 않은 손실을 감안한 가승미(加升米), 쥐가 갉아먹는 경우를 대비한 곡상미(斛上米), 품질 검사를 위한 간색미(看色米), 수량 점검을 위한 낙정미(落庭米), 가마니에 옮겨담는 과정에서 줄어드는 양을 보충키 위한 타석미(打石米), 증명서 발급 수수료 지가(紙價) 등 관행처럼 징수했지만 모두 법적 근거가 없어 뇌물이나 다름없다.


군역을 진 백성에게 반강제로 받아낸 뇌물은 아예 명목조차 없다. 군대 가는 것도 억울한데 군생활을 무사히 마치려면 장교와 아전에게 뇌물을 바쳐야 했다. 백번 양보해서 여기까지는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죽은 사람은 군역에서 빼 주어야 할 것 아닌가. 군역에 지정된 사람이 매년 바치는 군포가 2필인데, 죽은 사람을 군역에서 빼려면 군포 30필을 뇌물로 바쳐야 했다. 한번에 마련하기 어려운 액수다. 이러니 죽은 사람의 군포도 꼬박꼬박 낼 수밖에 없다. 백골징포(白骨徵布)가 만연했던 이유다.


가장 심각한 것은 공납이었다. 공물을 상납할 때 뇌물을 주지 않으면 품질이 나쁘다고 퇴짜를 놓는다. 임금님에게 바치는 공물보다 아전에게 바치는 뇌물이 먼저다. “진상품은 꿰미에 꿰고, 인정은 말에 싣는다”는 속담이 유행할 정도였다. 얼마 안되는 진상품을 바치기 위해 상납하는 뇌물이 말에 실을 정도로 많다는 뜻이다. 뇌물로 지출하는 돈이 공물 가격의 몇 배나 됐다는 기록이 숱하다.


이처럼 만연한 뇌물 수수 관행을 정부가 몰랐을 리 없다. 정부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근절을 시도했다. 인정을 ‘지나치게’ 요구하여 폐단을 일으키는 자는 3년간의 노역형에 처한다는 처벌 조항을 마련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래서 양성화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인정을 수수료로 합법화하되 2~3% 수준으로 억제했다. 하지만 그동안 조세 행정에 개입하여 막대한 이득을 보던 자들이 이 정도로 만족할 리 없다. 법적으로 허용된 인정은 ‘원래의 인정(元人情)’으로 고스란히 받고, ‘특별 인정(別人情)’ 따위의 명목을 신설했다. 인정은 갈수록 늘어나기만 했다.


부득이한 면도 있다. 물자가 오가면 부대비용이 발생한다. 운송비, 보관비, 포장비, 선적비, 하역비, 불가피한 사고로 인한 손실비 등이다. 그러나 정부는 이런 부대비용을 제대로 책정하지 않았다. 물자를 취급하는 사람들의 인건비도 터무니없이 비현실적이었다. 뇌물을 받지 않으면 먹고살 수가 없을 정도였다. 뇌물을 전면 금지하면 조세 행정이 마비될 판이었다. 그래서 성호는 “뇌물이 없으면 백관은 생계를 꾸릴 수 없고 아전은 굶어 죽을 것”이라고 했다. 구조적인 문제라는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뇌물이 세금보다 많은 구조는 정상이 아니다. 구조적인 요인을 도외시할 수는 없지만 문제의 핵심은 탐욕이다. ‘인정의 나라’는 더 가지려는 탐욕의 소산이다.


뇌물을 인정이라고 부른 이유는 무엇일까? 원래 법대로 하면 뇌물이 끼어들 틈이 없다. 뇌물을 주고받으려면 법을 넘어서는 핑계가 필요하다. 그것이 인정이다. 인정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마음이다. 누구나 그렇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명분이다. 똑같은 돈이라도 뇌물이라 하면 거부감이 들지만 마음으로 주는 선물이라 하면 거부하기 어렵다. 오히려 뇌물을 주지 않으면 인정머리 없고 각박하다며 큰소리쳤을 것이다. 인정은 뇌물 수수를 떳떳한 행위로 만들어주는 마법의 단어였다.


본디 인정은 법적 의무를 넘어서는 배려다. 하지만 그 초법적 속성으로 인해 인정은 불법을 눈감아주고 탐욕을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인권은 또 어떤가. 부당한 권력으로부터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인권이 오히려 권력자의 체면과 위신을 세워주는 변명거리로 이용되곤 한다. 인륜도 마찬가지다. 위법의 소지가 다분한 특권적 행위를 인륜의 문제로 포장하고, 타당한 의혹 제기를 반인륜적 행태로 매도한다. 더 가지려는 탐욕이 조선을 인정의 나라로 만들었듯,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탐욕이 오늘날 대한민국을 인륜의 나라로 만들었다. 


인정, 인권, 인륜은 원래 약자의 무기지만 이제는 강자를 보호하는 무적의 방패다. 한손에는 어떤 것에도 뚫리지 않는 방패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무엇이든 뚫을 수 있는 권력이라는 창을 들고 있으면서 그것이 모순(矛盾)인 줄 모른다. 묻고 싶다. 그 창으로 그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되는가?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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