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일본인은 정말 전쟁을 아는가

경향신문 2022. 5. 12. 10:41

저명한 일본사학자 나카무라 마사노리는 패전 후 일본을 이렇게 회상했다. “신주쿠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는데, 주변은 불탄 벌판이었고 검붉게 그은 함석으로 만든 판잣집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2~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세탄 백화점이 한눈에 들어왔다. (중략) 학교에 가보았더니 불타서 내려앉아 거무스름해진 주춧돌만 남아 있었다.” 그는 ‘전쟁에 진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일본전후사 1945~2005>) 나는 이 글을 읽을 때 ‘아, 일본인의 전쟁 이미지는 역시 이런 것인가’ 하는 이질감을 느꼈다.

직접 겪어보진 못했지만, 부모님이나 여기저기서 듣고 본 전쟁은 이렇게 한가한(?) 것이 아니었다. 적군이 눈앞에서 사람을 죽이고, 집 안으로 쳐들어올까 벌벌 떨고, 민간인끼리도 서로를 학살하고, 누가 우리 편인지, 적인지도 모르는 그런 것이다. 전쟁은 민간생활에 깊숙이 침투해 참상을 빚어냈다. 한국전쟁에서는 죽음의 피란 행렬이 계속되었고, ‘낮에는 태극기, 밤에는 인공기’라는 말처럼, 일상생활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죽이는 상황이었다. 베트남전쟁에서도 적군이 섞여 있는 것으로 의심되는 마을에 대한 학살이 자행되었다. 중일전쟁도 마찬가지다.

그에 비해 근대일본의 전쟁은 죄다 일본 밖에서 벌어진 일이다. 타이완 침략(1874), 청일전쟁(1894), 러일전쟁(1904), 시베리아 파병(1918),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7), 태평양전쟁(1941), 모두 그렇다. 전투가 일본 내에서 벌어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에 있던 단 한 명의 민간인도 전쟁으로 죽는 일은 없었다. 전쟁은 국가의 일이었지, 나의 일은 아니었다. 이 때문에 정치사상가 하시카와 분조는 “일본인은 그것(중일전쟁)을 전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태평양전쟁의 사정은 좀 다르긴 했다. 전쟁 막바지에 시작된 미 공군의 공습으로 민간인 수십만명이 죽었다. ‘간토대공습’이란 말을 들어본 독자도 계실 것이다. 공습은 간토지역뿐 아니라 일본 전역에 행해졌고, 그 정점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폭 투하였다. 무자비한 대공습은 나카무라가 본 대로 도시를 ‘벌판’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오키나와를 제외하고는, 태평양전쟁에서도 지상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눈앞에서 적군이 이웃과 가족을 죽이는 일은 겪지 않았다. 병사들은 동남아 밀림에서 만주 벌판에서 태평양의 고도에서 죽어갔지만, 그 참상은 매스미디어도 전해주지 않았다. 일본에 진주한 미군은 단 한명의 민간인도 죽이지 않은 채 ‘신사적’으로 점령했다.

공군에 의한 폭격이 덜 잔인한 전쟁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많은 일본인들이 전쟁을 나카무라처럼 기억하는 한, 전쟁의 참혹함을 진짜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문학가 요시다 겐이치(吉田健一)가 말한 대로, 전쟁은 친한 사람과 헤어져 전쟁터로 간다든가, 원자폭탄으로 사람이 일시에, 혹은 천천히 죽는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선전포고가 행해지면 언제 적이 자기 문 앞에 나타날지 모르는, 또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가토 요코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얼마 전 일본의 헌법기념일을 맞아 아사히신문이 개헌 관련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 결과 개헌찬성 56%, 개헌반대 37%로 작년에 비하면(개헌찬성 45%, 개헌반대 44%) 1년 만에 찬성 여론이 급격히 높아졌다. 개헌 여론은 2013년 이후 가장 높은 수치다. 다만 군대와 전쟁금지 조항(제9조)을 콕 집어 물은 질문에는 여전히 개정 반대 여론이 높은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경향신문 5월4일자 보도). 개헌의 ‘개’자도 꺼내기 어려웠던 과거 분위기에 비하면 놀랄 만한 변화다. 동아시아는 다시 군비경쟁의, 그 어리석었던 시대로 돌아가야 하는 것일까.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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