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전봉준과 박영효

경향신문 2020. 9. 17. 15:46

1894년 11월 박영효가 내부대신이 됐다. 얼마 후 우금치에서 동학농민군이 패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녹두장군 전봉준이 서울로 끌려오자 박영효가 직접 심문했다고 한다. ‘위로부터 혁명을 일으킨’ 인사가 ‘아래로부터 혁명’을 일으킨 장본인을 다그치는 진풍경이었다(오지영의 <동학사>).

그들이 만나자 엄청난 설전이 벌어졌다고 한다. 편의상 3회전으로 정리해볼 수 있는데, 1회전은 전봉준의 죄상을 꾸짖는 시간이었다. 박영효는 세상에 알려진 전봉준의 죄상을 외웠다. 반란군을 이끌고 전주를 함락한 죄, 무기와 군량미를 빼앗은 죄, 조정 관리를 살해한 죄, 세금을 임의로 사용한 죄, 양반과 부자를 핍박한 죄, 노비문서를 없애 사회기강을 흔든 죄, 농경지를 백성에게 나눠주어 법질서를 무너뜨린 죄 등이 길게 나열됐다.

2회전은 반격의 시간이었다. 전봉준이 일격을 가했다. 조선 사람은 과연 언제까지 외국에서 들어온 사상이나 종교에 매달려 살 것인가. 동학(東學)이란 훌륭한 사상이 나왔는데도 어찌 박해하는가. 전봉준은 그 자신을 변호하며, 박영효 대감을 조용히 타일렀다.

동학은 잘못된 세상을 고쳐 좋은 세상을 만들어 보려는 사상이다. 누구나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 좀 좋은가. 낭비하는 세금을 풀어서 의로운 저항을 벌이는 것은 옳으며, 탐관오리와 탐욕스러운 부자를 응징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낡은 신분제도를 고집하고, 공유할 농경지를 개인이 독점해 빈부 격차가 벌어진 것은 잘못이다. 이런 못된 짓을 바로잡으려 일어섰는데, 그런 우리를 외세의 힘으로 소탕하다니! 실은 대감의 죄가 무겁다.

마지막 회전은 참으로 현실적이었다. 박영효는 전봉준과 흥선대원군을 하나로 엮어서 엄벌하려고 했다. 전봉준이 수긍하지 않자, 박영효는 동학농민이 ‘척왜척양’을 부르짖으며 외세를 배격한 사실만 보아도 대원군과 협력했다는 점을 충분히 알 수 있다고 했다. 전봉준은 이를 한마디로 일축했다. 일본과 서양은 백성의 적이다. 대원군 한 사람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마침내 전봉준은 박영효와 더는 이야기할 뜻이 없다고 했다. 대감 같은 사람들을 없애고 나라를 바로잡으려 일어섰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니 대감은 저를 죽이시라. 달리 할 말이 없다.

큰 틀에서 정리해보면 어떨까. 1884년 갑신정변이란 위로부터의 혁명이 있어서, 그 토양 위에서 1894년에 아래로부터의 혁명, 즉 동학농민혁명이 피어났다는 설명도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보았듯, 두 사람의 혁명가는 사고방식이 달랐다. 대대로 특권을 누린 서울 귀족 박영효와 전라도 시골의 평민 지식인 전봉준, 두 사람 가운데 우리와 가까운 이는 누구일지 궁금하다. 박영효는 전봉준의 생각을 미처 따라가지 못한 것이 아니었을까. 후세의 눈에는, 전봉준이야말로 새 역사의 물꼬를 활짝 튼 이였다.

지금도 혹자는 지난날의 투쟁경력을 과시하며 우쭐대고, 혹자는 수십년 전 성적표를 들먹이며 뻐긴다. 하지만 세상 사는 것은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아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뒤처진다. 공자는 부진즉퇴(不進즉退)라고 했단다.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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