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정조는 냉철한 현실주의자

경향신문 2020. 10. 22. 10:52

정조는 어려움을 이기고 왕이 되었다(1776년). 그에게 큰 걱정이 있었는데 많은 백성이 생계를 꾸리지 못할 만큼 가난하다는 사실이었다. 정조가 반포한 ‘윤음’(담화문)엔 왕의 고뇌가 여실히 담겨 있다. 가엾은 백성들에게 땅을 나눠주고 싶으나 불가능하니, 조세라도 공평하게 부과해야겠다는 다짐이었다.(<홍재전서>, 제26권)

 

시일이 흐르자 왕의 생각은 달라졌다. 정조 20년(1796) 가을, 왕은 말하였다. “경작지를 9등급으로 나누는 법이 무너져 모든 땅이 최하 등급이다. 경들은 토지조사를 통해 폐단을 바로잡고자 하지만 나는 반대한다. 송나라의 주자(주희)도 난리를 겪은 다음에나 이런 사업이 가능하다고 하지 않았던가.”(<일성록>, 정조 20년 9월29일) 정승 채제공이 공감을 표시하며, 다수 백성이 파산할 지경이라야 대규모 개혁이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정조는 ‘양전’(농경지 조사)조차 거부하였다. 지평 이경신이 상소를 올려 양전을 촉구하자 왕은 반대의 뜻을 밝혔다. 주자가 양전을 시도했으나 향리의 실력자가 방해해 무위에 그친 사실을 왕은 언급하였다.(<홍재전서>, 제46권)

 

농민에게 땅을 나눠주자는 정전론이나 균전론에 대해선 당연히 반대하였다. 정조의 뜻에 부응해 대신 윤시동은 토지 개혁이 비현실적임을 논증하였다. “인구가 적고 경작지가 많으면 균전제도를 시행할 수 있으나, 지금처럼 인구가 많았던 적이 없습니다. 균전은 불가능합니다.”(<일성록>, 정조 20년 9월29일)

 

정조 23년(1799), 유생 임박유는 글을 올려 부호의 농지 점유를 제한하자는 주장을 꺼냈으나, 왕은 거절하였다.(<홍재전서>, 제46권) 천하 명군 정조가 실학자들의 이상인 토지 개혁을 외면하다니, 이유가 뭘까.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왕은 중국 역사에서도 토지제도를 개혁한 적이 사실상 없었다는 점을 거듭 확인하였다. 균전법이 부분적으로나마 시행된 것은 200년 미만이었다. 그것도 임시조치에 지나지 않았다. 정조는 누차 그 사실을 언급하며 토지 개혁을 부정하였다.(<홍재전서>, 제119권과 제127권)

 

둘째, 조선은 농토가 부족하다는 사실이었다. 정조가 알아본 결과, 전국의 농부에게 1결(최소 1만㎡)씩 지급하려 하여도 663만6000여결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 당시 농지보다 4~5배나 많은 땅을 과연 어디서 얻겠는가? 즉위 초부터 정조는 잠을 이루지 못한 채 토지 개혁 문제를 고심했으나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확신만 얻었다.

 

끝으로, 재물이란 누구든 고르게 나눠 가질 수 없는 속성을 가진다는 믿음이 점차 정조를 사로잡았다. 제아무리 노력해도 소유는 불공평하기 마련이라는 자각이었다.(<홍재전서>, 제116권)

 

그리하여 왕은 제도 개혁으로 백성을 살찌울 생각을 버렸다. 그의 눈에는 실학자들의 제도 개혁론이 무용한 주장으로 여겨질 뿐이었다. 각종 제도를 새로 만들어 민본의 정치를 추구한 세종과는 크게 달랐다. 정조가 현실의 한계를 냉철하게 인식한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니었으나 한계를 돌파하려는 의지는 좀 부족하였던 것 같다. 우리 안에도 세종보다는 정조가 너무 많아서 걱정이다.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