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칼럼

[조호연 칼럼]‘백선엽 논란’, 지체된 정의

경향신문 2020. 6. 17. 11:29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에 대한 국립묘지 안장 찬반 논란이 불거졌다. 김병기·이수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립현충원에 묻힌 친일반민족 행위자들을 파묘해 다른 곳으로 옮기는 내용의 국립묘지법 개정안을 추진하면서다. 현재 서울과 대전 현충원에는 60여명의 친일파가 잠들어 있다. 두 국회의원은 나라에 헌신한 이들을 모시는 현충원에 친일파들은 묻힐 자격이 없기 때문에 강제로라도 이장해야 한다고 법 개정 취지를 설명한다. 이 내용대로 법 개정이 이뤄지면 백 장군은 사후 국립묘지 안장이 어려워진다.


보수 세력은 격렬하게 반대한다. 전쟁 영웅을 예우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수 일각의 논리는 도를 넘는다. 원희룡 제주지사는 “백선엽 장군은 6·25의 이순신인데, 현충원 안장은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순신 장군은 반민족적 행위를 한 적이 없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대한민국에 기여한 부분이 더 크다면 그에 합당한 예우를 하는 게 맞다”고 강조했다. 반민족 행위자와 전쟁 영웅은 성격이 다르므로 ‘형량비교’ 불가다. “백 장군이 현충원에 못 간다면 더 이상 대한민국이 아니다”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분명히 해둘 게 있다. 백 장군은 일제 때 독립군을 탄압한 ‘간도특설대’ 장교로 복무한 친일파다. 학계의 주장이 아니라 2009년 대통령 직속 정부 기구가 공식 인정한 사실이다. 백 장군이 6·25 때 중요 전투에서 잇따라 승리한 ‘전쟁 영웅’으로 불리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친일 행각을 덮을 순 없다. 보수 세력은 백 장군의 행적과 관련해 해방 후, 특히 6·25 때의 활약에 초점을 맞춘다. 북한과 싸운 역사만 인정하고 일제에 항거한 역사는 부정하겠다는 식이다. 이는 국가정체성의 문제다. 대한민국 역사는 해방 후 갑자기 시작된 게 아니다. 대한민국 헌법은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일제하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과 반식민투쟁이 대한민국의 뿌리임을 명기한 것이다. 헌법을 거스르겠다는 말인가.


백 장군은 흔히 프랑스의 앙리 페탱 원수와 비교된다. 페탱은 1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을 격퇴해 조국을 구한 ‘국부’로 불렸으나 2차 세계대전 때는 콜라보라시옹 즉 나치 독일에 부역한 죄로 사형선고를 받은 인물이다. 콜라보라시옹 단죄를 주도한 드골은 “국가는 애국적 국민에게 상을 주고 민족 배반자에게는 벌을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단순명쾌한 논리가 한국에서는 통용되지 않았다. 식민 역사를 청산하지 못한 한국 현대사는 왜곡과 굴절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흑역사의 첫 단추를 끼운 것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다. 반공주의 정책 기조 속에서 친일파들은 청산은커녕 강력한 권력집단으로 부활했다. 그들은 지배층의 중추 세력이 되었고, 그 후손들도 대를 이어 권력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더 고약한 것은 친일파에게 반공주의가 생존의 무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친일 청산을 요구하는 인사들을 ‘역청산’하는 명분이 되었다는 점이다. 친일파 비판자들에게 빨갱이, 종북 모자를 씌우는 색깔론이 이때 등장했고, 지금까지도 보수 세력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고 있다. “여권 지지세력이 백 장군을 공격하는 진짜 이유는 그가 친일파여서가 아니라 6·25 때 공산군과 싸워 이겼기 때문일 것”이란 보수 언론 주장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일 터이다.


친일 문제는 제때 청산되지 못하고 지연되면서 계속 곪아터지는 상처가 되었다. 2004년에야 국가가 청산에 들어가 백 장군 등 1000여명을 선별해 친일반민족 행위 결정을 내리고, 일부 친일 재산을 국고에 환수했다. 그러나 사법적 처벌은 없었다. 인적·제도적 청산보다는 진상규명을 통한 역사적 청산에 그친 것이다.


현충원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호국 영령들의 영면 장소다. 그럼에도 국가가 공인한 친일파들까지 그곳에 안장해왔다. ‘반공 전선’에서 공을 세웠다는 이유다. 보수 세력이 현충원을 독점한 채 보수적 이념과 가치 유지, 재생산에 활용해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오죽하면 임시정부 마지막 비서장 조경한 선생이 “나를 친일파가 있는 국립묘지가 아니라 동지들이 잠든 효창공원에 보내달라”고 유언했겠는가.


현충원도 친일 청산이 필요하다. 그곳의 친일파들은 이장하되 더는 친일파를 안장하면 안 된다. ‘백 장군 논란’도 이런 관점으로 접근하는 게 맞다. 지체된 정의, 친일 청산은 계속돼야 한다.


<조호연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