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진영을 넘나든 정치가들의 활극, 메이지유신

경향신문 2021. 10. 28. 09:39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져가던 1860년대 막부에는 가쓰 가이슈(勝海舟)라는 인물이 있었다. 낯선 이름이지만 일본에서는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멘토로 유명하다. 최하급 신분이었음에도 출중한 능력으로 요직에 발탁되었다. 당시는 사쓰마, 조슈를 중심으로 한 반막부 세력이 막부에 도전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가쓰는 이 진영 대립의 시기에 ‘진영 논리’에 갇히지 않았다. 그는 막부가 권력을 독차지하던 시대는 지났다며 권력 공유를 주장했다. 대정봉환(大政奉還·대권을 천황에게 돌려준다)을 구상하고 막부 측 인사들을 설득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권력을 나눠 갖는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일이다. 막부 실세들이 그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적진에 뛰어들어 사쓰마번의 실세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를 만나 막부와 사쓰마, 조슈번 등이 천황 밑에 연합정권을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사이고는 이를 ‘공화정치’라고 호명했다. 메이지유신(1868)이 일어나기 3년여 전이었다.

 

사이고는 가쓰를 만나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실로 놀라운 인물이다. 두들겨 패줄 심산으로 만났지만 완전히 머리를 숙이고 말았다. 얼마나 지략이 있는지 모를 정도였다. 학문과 견식은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이 발군이지만 실제 일을 다루는 솜씨는 가쓰 선생이 최고다. 정말 반해버렸다.” 사쿠마 쇼잔은 당대 최고의 양학자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과 사카모토 료마 등을 가르쳤던 인물이다. 반하기는 가쓰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만나봤더니 식견과 논리 면에서는 내가 나았지만, 천하대사를 짊어지는 것은 결국 사이고가 아닐까”라고 내심 생각했다.

 

이처럼 가쓰는 정적이라도 말이 통하면 광범위하게 교류하면서 자신의 구상을 숨김없이 피력했다. 그럴수록 막부 핵심에서는 멀어져 갔지만 사쓰마, 조슈 측의 평가는 점점 높아져갔다. 교토에서 왕정복고 쿠데타가 발발하고 천황 군대가 에도성을 공격하기 하루 전, 결국 막부는 가쓰를 육군총사령관으로 삼아 전권을 부여하고, 사이고와 협상하도록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마음으로 맺어져 있던 두 사람은 단번에 타협책을 찾아냈다. 이로 인해 에도 100만 시민은 전쟁의 참화를 면했고, 일본은 전면적인 내전을 피할 수 있었다. 정치인이란 결국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천황 군대가 에도에 무혈입성한 후에도 역사에서 보기 드문 일이 벌어졌다. 에도 점령을 보고하기 위해 교토로 돌아가는 사이고가 에도의 치안 유지를 가쓰에게 맡긴 것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적군의 총책임자였던 사람에게 말이다. 그 담대함에 가쓰도 기가 막혔던 모양이다. “대담한 사이고는 뜻밖에도, 정말 뜻밖에도 이 난국 타개를 내게 맡겨버리고는 ‘어떠십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지금부터의 일은 가쓰 선생께서 어떻게든 해주시겠지요’라고 하고는 에도를 떠나버렸다. 이 막연한 ‘해주시겠지요’라는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졸저 <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가쓰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 줄도 모르고 과격파들은 그를 ‘배신자’라고 공격했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평화적 정권 이양이라는 대업을 마쳤다. 그러고는 메이지 정부의 출사(出仕) 요청을 뿌리치고, 유신(遺臣)이 되어 살길이 막막해진 도쿠가와 가신단의 취업과 생계 지원에 남은 생을 바쳤다.

 

특이한 것은 그가 흥선대원군과 교류가 있었다는 점이다. 한·중·일 3국의 연대를 강조하며, 메이지 정부의 공격적인 아시아 정책에 비판적인 그였던 만큼 조선정계에도 관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대원군이 죽자 가쓰는 “대원군이 마침내 죽었구나. 이 인물에 대해서는 갖가지 평가가 있지만 어쨌든 일세의 위인이다. … 나는 대원군이 나를 알아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추모했다(<氷川淸話>). 둘은 선물도 교환했고 일본에 있던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은 가쓰를 여러 번 찾았다. 권력의 정점에서 물러난 두 사람은 무슨 맘으로 교분을 나눴던 것일까.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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