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천황인가, 일왕인가

경향신문 2021. 5. 13. 09:53

칼럼을 쓰다보면 신문사에서 일본 천황을 곧잘 일왕으로 고친다. 일본의 임금을 무어라 부르면 좋을까. 해방 후 오랫동안 천황이라 불러왔으나, 대략 1990년대부터 매스미디어는 일왕이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천황이라고 한다. 이낙연 총리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도, 강창일 주일대사가 부임했을 때도 천황이라 불렀다.

 

1868년 메이지유신이 발발하자 일본은 조선에 신정부 승인을 요청했다가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그 외교문서에 중국 황제만 쓸 수 있는 ‘황(皇)’의 글자가 있었고 메이지라는 일본 연호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조선은 개국 이래 중국만을 황제로 인정하고, 그 연호를 사용해왔는데, 일본이 이런 오래된 외교관례를 갑자기 무시했으니 조선의 대응은 정당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은 어떠한가. 천황이라는 호칭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기분 나쁘고 자존심 상한다고 한다. 우리가 일본 밑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왕조시대에 살고 있나? 천황이라고 하면 우리 대통령보다 높은 게 되나? 그럼 우리도 대한제국으로 다시 돌아가 황제도 만들고 연호도 제정하면 자존심이 회복되나? 강희제, 건륭제 같은 중국 황제는 그대로 불러도 괜찮나? 그렇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왕조시대 사람이다.

 

1919년 3·1운동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했다. 신해혁명으로 황제 지배체제가 무너진 중국에서는 위안스카이가 황제 부활을 시도했다. 하지만 한국인은 한 치의 미련도 없이 왕정을 폐지하고 당당히 공화국을 수립했다. 일본은 젊은 청년들을 가미카제로 내몬 자국의 천황제를, 나라가 결딴나고서도 결국 청산하지 못했다. 그래서 공식 국명이 일본왕국도, 일본공화국도 아니고 어정쩡하게 ‘일본국’이다. 왕정 폐지는커녕 아직도 헤이세이, 레이와 하며 연호로 시대를 감각하고 서로의 나이도 확인한다. 천황이면 어떻고 일왕이면 어떻고 애초에 이런 시대착오적인 역사 감각에 신경 쓸 필요가 있는가.

 

그럼에도 왜 천황 호칭을 굳이 택해야 하는가. 아무리 과거사가 있고 사이가 안 좋다 하더라도 일본은 우리의 적국이 아니다. 일본 정부가 수출규제를 도발했을 때 이에 항의하는 일본 지식인들의 성명서 제목도 ‘한국은 적인가’였다. 적국이 아니라면 그 나라의 호칭을 존중해주는 것이 성숙한 자세다. 한국을 제외한 전 세계가 천황(Emperor)이라고 불러주는 이유다. 한때 일본 극우인사가 세계의 중심도 아닌데 왜 ‘중국’이냐며 ‘지나’라고 부르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만약 그런 사람들이 뭐가 크다고 대통령이냐, 난 소통령으로 부르겠다고 하면 어불성설일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반을 기분 나쁘다고 주석(主席) 대신 말석(末席)으로 부를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치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다. 감격스러운 문장이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제2조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라고 천명한다. 반면 일본국 헌법 제1조는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 국민통합의 상징으로서 그 지위는 주권을 가진 일본 국민의 총의에 기초한다’다. 어째 국민이 아니라 천황이 맨 앞에 나오나. 다음에라도 나오려나? ‘황위는 세습되며, 국회가 의결한 황실전범이 정하는 바에 따라 승계한다.’ 이게 제2조다. 국민의 권리와 의무는 제10조에서야 나온다.

 

일본 국민의 의식은 ‘천황’ 아래 억눌려 있고, 일본의 민주주의 역시 그 이름 아래 제한되어 있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공화국의 시민이다. 황제가 됐든, 천황이 됐든, 임금이 됐든 우리는 그 세계와 연을 끊고 공화국을 수립했다. ‘황’을 쓰느냐 어떤 연호를 쓰느냐가 조선 백성에게는 중요했을지 몰라도 우리 공화국 시민에게는 아니다. 천황 아니라 ‘옥황상제’라 한들 가볍게 불러주면 된다. 그게 민주공화국 시민의 자부심이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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