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퇴<退>, 회<晦>, 잠<潛>

경향신문 2021. 6. 17. 09:30

최근 능력주의에 대해 익숙하게 들었던 것과 다른 목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한다.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는 ‘개천에서 난 용’의 신화가 있었다. 능력주의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보여주는 말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개천에서 난 용’들은 공적 직무에 따른 권한을, 자기 능력으로 획득한 일종의 트로피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이 나온 맥락이다. 그랬던 ‘능력주의’가 의심받기 시작했다. 그 ‘능력’이 우리 공동체에 유익한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들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역사적 사실들을 안다고 해서 그 의미까지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식을 키워봐야 부모 마음을 알게 된다는 말이 있듯이, 같은 처지에 놓이고 나서야 상황을 실감하게 된다. 조선시대 훈구와 사림의 대립도 그렇다. 훈구와 사림은 세조 시대(1455~1468)의 유산이다. 세조는 조선 건국 63년째에 즉위해서 13년간 재위했다. 2021년은 대한민국이 건국된 지 73년째이니, 지금을 조선시대로 치면 세조 11년이다. 흥미롭게도 현 사회 상황이 당시와 비슷하게 되어 훈구와 사림의 대립을 다시 이해하게 된다.

 

새삼스레 사림과 훈구의 대결에서 어느 편이 이겼는가가 지금 중요하지는 않다. 대신 흥미로운 것은 사림이 도대체 어떻게 막강한 정치적·경제적 자원을 가진 훈구를 이겼을까 하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의외의 결과였다. 사림은 똑똑하기는 해도 그저 경제적으로 조금 여유 있는 지방 출신들이 많았고, 그들 모두 그랬던 것도 아니다. 사실 당시에도 훈구의 일부가 되려고 애쓴 사림이 적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마도 훈구는 사림을 자신들의 진지한 정치적 경쟁상대로 인식하지도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아마도 사림이 훈구를 이겼던 핵심적 이유는 사림이 ‘능력’이 아닌 ‘가치’를 선택한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림은 훈구와 다른 존재가 되고자 했다. 사림이 훈구와 같은 것을 욕망했다면 그들은 훈구를 결코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 김굉필이다.

 

김굉필(1454~1504)의 생애는 당시의 사회 기준에서 보아도 보잘것없다. 그는 문과에 합격하지 못했고, 겨우 생원시에 합격했을 뿐이다. 40세에야 종9품 참봉이 되었다. 그 후 약간 승진했지만 4년이 고작이었다. 그는 짧은 관료 재직 기간보다 긴 기간을 유배 살다가 결국 갑자사화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는 자기가 믿는 가치에 목숨을 바쳤다. 물론 당시에도 김굉필의 처신은 영리한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이유로 사림은 자신들을 대표하는 최고의 인물로 김굉필을 기렸다. 역사적 맥락에서 중요한 것은, 김굉필이 죽었다는 것보다, 사림이 그 죽음의 의의를 시대정신으로 기렸다는 사실이다.

 

한국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사회 개혁의 격랑 속에 놓여 있다. 역사적 관점에서 말한다면 한국 사회 앞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이제까지 한국 사회가 이룩한 성취에 기여했던 세력의 후손들이 기득권 세력으로 그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 경우 사회는 크고 작은 갈등이 이어지며 현 상황을 상당 기간 이어가지만 장기적으로 침체의 길로 접어들 가능성이 높다. 다른 하나는 기득권 집단을 억제하면서 새로운 가치와 더 나은 사회 발전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일정한 성취에 도달했던 대부분의 국가는 첫 번째 길을 걸었다. 이것이 보통 200년 정도 지속된 일반적 왕조들의 모습이다. 조선이 일반적 왕조들의 두 배쯤 되는 기간 동안 유지되었던 것은 기득권 세력과의 투쟁에서 성공한 대안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굉필 후예인 조선시대 인물들 호에는 퇴(退), 회(晦), 잠(潛) 같은 글자들이 자주 나온다. 퇴계 이황, 회재 이언적, 잠곡 김육 같은 인물들의 호이다. 이 글자들은 그들이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고 세상에 자신을 빼앗기지 않기를 욕망했음을 보여준다.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