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한·일 대학생 ‘일본 인식의 덫’ 넘어서기

경향신문 2021. 9. 30. 10:59

지난 9월17일 한·일 대학생들 간에 한·일관계를 주제로 한 토론이 있었다. 서울대 동아문화연구소와 포니정재단이 마련한 자리였다. “일본 학생들이 역사문제에 대한 인식은 없이 K팝이나 한류 드라마를 그냥 소비하는 건 우려할 만한 일”이라고 한 학생이 말하자, 바다 건너(온라인 회의) 한 학생이 대답했다. “그렇긴 합니다만 그런 학생들도 존중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역사의식이 없다고 비판하는 것은 또 하나의 가해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일본 청년들이 BTS를, 한국 젊은이들이 유니클로를 자유롭게 소비하면 안 되나요?”

 

뜻밖에도 전자는 일본 학생, 후자는 한국 학생의 발언이다. 이날 대화는 시종 이런 틀에서 이뤄졌다. 일본 측 히토쓰바시 대학 학생들은 얼마 전 <한·일관계의 ‘답답함’과 대학생인 나>라는 책을 공동집필하여 한국 언론에도 소개된 바 있다. 이들은 시종일관 일본의 책임과 한국에 대한 사과를 주장했다. 이런 입장은 대체로 전후 일본 사회의 진보진영(사회당, 진보지식인, 아사히신문)이 견지해오다 최근 우경화 분위기로 세력이 약해졌다. 일본 학생들은 여기에 ‘피해자 인권의 존중’이라는 측면을 더 얹으면서 일본 사회의 분위기에 강인하게 대항하고 있었다. 그들의 ‘고군분투’가 기특하고 든든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입장이 그 도덕적 고결함에도 불구하고 일본 보통사람들의 입장과 심정을 세심하게 고려하지 않은 탓에 지금처럼 수세에 몰리게 됐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이 일본 시민들의 눈높이에서 보면 지나치게 이상적인 것이어서 현재의 고립을 더 강화시키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도 들었다. 물론 우리에게는 고맙고, 또 연대를 표해야 할 입장이다.

 

지금까지 한·일 간 대화에서는 대체로 일본 측이 이런 입장을 표명하면 한국 측이 호응, 격려(?)하면서 함께 일본제국주의나 현재의 일본 정부를 비난하는 형태가 반복되어 왔다. 이날도 이런 싱거운(?) 회의가 되겠구나 했는데, 아니었다. 한국 학생들이 이런 금과옥조 같은 말씀들에 까칠하게 반응한 것이다. 졸던 귀가 깼다. 북한 문제와 관련해서 ‘민족끼리’를 강조하는 일본 측(일본 진보세력은 북한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이었다)에 대해 한국 학생 A는 한국전쟁의 참화를 겪은 한국인들의 북한에 대한 감각을 잘 모르는 거 같다고 지적했다. 아마 지금껏 한·일 간 대화에서 일본 측이 잘 접해보지 못한 반응이었을 거다. 일본 학생이 일본의 미진한 역사교육을 비판하자, A는 한국도 역사교육에 관한 한 피차일반이라며 쿨하게 반응했다. 이에 일본 학생이 그렇더라도 가해자 일본과 피해자 한국은 다르게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어디까지나 한국은 비판 대상에서 제외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졌다.

 

일본 측이 가해자-피해자 프레임을 강조하며 가해자 일본을 강하게 비판하자, 한국 학생 B는 그걸 부정하진 않으나 그와 동시에 ‘식민주의’ 자체를 비판해야 하고, 그것이 당시 일본의 보통사람들에게 끼친 폐해, 더 나아가 현재 일본의 국가주의 강화에 미친 악영향을 함께 시야에 넣어야 한다고 발언했다. 역사 문제를 한·일 양국의 틀에 가두지 않고 제국주의 시대를 같이 겪은 전 인류의 반성 소재로 삼고자 하는 대담한 제언이었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식민종주국에 사과를 요구하고, 그걸 외교 문제로 삼고 있는 유일한 나라다(본 칼럼 3월8일자 ‘식민지는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문제?’).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이 문제를 보다 설득력 있게 만들기 위해서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사과하라’보다는 식민주의라는 괴물에 대한 공동의 투쟁을 촉구하는 것이 훨씬 좋은 전략일 것이다. 그것은 자유주의나 민주주의에는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식민주의에는 상대적으로 둔감한 일본의 지식인을 일깨우는 길이 될 수도 있다(이에 대해서는 필자가 일본의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를 비판한 ‘너를 보니, 내 옛 생각이 나서 좋다’, ‘서울리뷰오브북스’ 3호 참조).

 

우리 20대 학생들이 기성세대가 걸려 있는 ‘일본 인식의 덫’을 이렇게 장대높이뛰기로 넘어서고 있는 줄 미처 몰랐다. 그들의 지성에 박수를 보낸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